{ "data": [ { "temp_Title": "감찰하시는 하나님", "temp_SubTitle": "", "temp_Bible": "시 139:1-4", "temp_Preacher": "당회장 이수진 목사", "temp_Present_Date": "2012.12.09", "temp_bbs_note": "요즘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중에 CCTV를 통해 자동차의 이동이나 우리의 행동이 촬영되곤 합니다. 한밤중이나 캄캄한 곳에서도 적외선 카메라로 촬영되어 범죄자를 찾는 데도 이용됩니다. 이처럼 발달된 과학문명으로도 곳곳을 살필 수 있는데 하물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어떠하시겠습니까? 오늘은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하나님과 우리가 행해야 할 바에 대해 증거하고자 합니다.

1.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시는 하나님

성경에는 하나님이 얼마나 세밀하게 잘 아시는지를 보여 주는 예가 나와 있습니다. 엘리사 선지자 시대에 아람이라는 나라가 이스라엘을 자주 침공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람 왕과 신복들이 이스라엘 침공을 위해 세운 계획들이 매번 허사로 돌아갔습니다. 이로 인해 아람 왕은 자신의 신복 중 이스라엘과 내통하는 첩자가 있어서 자신들의 계획을 누설한다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열왕기하 6장 11~12절에 “아람 왕의 마음이 번뇌하여 그 신복들을 불러 이르되 우리 중에 누가 이스라엘 왕의 내응이 된 것을 내게 고하지 아니하느냐 그 신복 중에 하나가 가로되 우리 주 왕이여 아니로소이다 오직 이스라엘 선지자 엘리사가 왕이 침실에서 하신 말씀이라도 이스라엘 왕에게 고하나이다” 한 대로 하나님께서 엘리사 선지자를 통해 적진 상황을 미리 알려 주시니 이스라엘 왕이 대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보고 듣지 않은 일까지도 다 알고 계십니다. 온 지구를 살피시는 것은 물론 천사들을 통해 우리의 행위를 기록하고 계시지요. 시편 139편 1~4절에도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했습니다.

감찰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행함과 생각은 물론, 마음에 품은 모든 것도 알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10장 30절에는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으신 하나님 앞에 우리는 어떤 것도 숨길 수 없고 ‘아니다’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사실을 믿는 것이 믿음인데도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그분을 의식하지 않거나 심지어 무시합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요.

진정 믿음이 있다면 내 삶의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과연 나는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얼마나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는지 말씀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2.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의지한다면

첫째로, 범죄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범죄할 때에 사람의 눈과 CCTV만 피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범죄한 후 발각되지 않으면 완전범죄로 생각하지요. 하지만 사람의 눈과 CCTV보다 더 정확하고 세밀하게 감찰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다면 그분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애굽의 종으로 팔려간 요셉은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그 주인에게 인정과 사랑을 받고 있었는데 어느 날, 요셉에게 그의 아내가 동침하기를 청합니다. 그때 요셉은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라고 거절한 것은 물론, 함께 있지도 않았습니다(창 39:9). 단둘이 있는 상황에서 유혹이 왔지만 그는 하나님의 눈을 의식하여 결코 범죄하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믿음이 적은 사람일수록 어떠합니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니 사람의 눈만 피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요나 선지자가 그리하였습니다. 니느웨로 가라 하신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다시스로 향하였지요(욘 1:3). 그리고는 배 아래 칸에서 잠을 잤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 보고 계셨습니다. 이처럼 요나가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니 배에 함께 있던 사람들까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또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은 성경상 인물로는 게하시를 들 수 있습니다.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 선지자의 말대로 요단강에 일곱 번 잠그고 문둥병을 치료받습니다. 그때 그가 엘리사 선지자에게 감사예물을 드리려 하지만 그냥 돌려보냅니다. 이를 보고 있던 사환 게하시는 물질에 욕심이 생겨 나아만 장군 뒤를 쫓아갑니다. 엘리사 선지자가 예물이 조금 필요하다며 거짓말을 합니다. 게하시는 그 예물을 받아 집에 숨겨놓습니다. 그리고 아무 일이 없던 것처럼 엘리사 선지자에게로 돌아옵니다. 그러자 엘리사 선지자는 모든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게하시에게 “어디서 오느냐”고 묻습니다.

그는 회개해야 하는데도 오히려 시치미를 떼고 “종이 아무 데도 가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둘러댑니다. 그때 엘리사는 “그 사람이 수레에서 내려 너를 맞을 때에 내 심령이 감각되지 아니하였느냐” 하지요. 결국 그는 문둥병이 발하는 저주를 받게 됩니다. 게하시는 자신의 행동을 본 사람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다 보고 계셨고 엘리사 선지자에게 알리셨던 것입니다(왕하 5장).

전도서 12장 14절에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매순간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하나님 앞에 우리의 행함을 하나하나 체크해 보아야 합니다. 죄를 짓지 않는 것은 물론, 기도하며 성결을 위해 노력하는데도 믿음의 성장이 빠르지 않다면 지난날을 되돌아 보아야 합니다. 혹여 사망에 이르는 죄나 심히 악한 죄를 짓고도 이를 잊어버렸거나 대수롭게 여기지 않아 회개치 못함으로 담이 되지 않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남녀 사이의 사망에 이르는 육체의 일은 회개했지만 성전 안에서 스킨십한 일을 회개하지 않았다거나, 기관 회비를 임의로 사용했으면서도 채워 넣지 않고 그냥 지나치지는 않았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마태복음 5장 26절에 보면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용서와 사랑의 하나님이시므로 우리가 중심에서 회개하고 돌이키면 용서해 주십니다.

혹여 하나님과 죄의 담이 여전히 남아 있지 않은지 부지런히 찾아 통회자복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회개의 영이 임하며 잊었던 어린 시절의 죄라도 떠올려 주시는 것입니다. 진정 은밀한 것까지 살피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면 허물과 죄를 철저히 회개하였는지를 점검하여 참된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작은 죄악이라도 하나님이 보고 계심을 깨달아 절대로 용납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둘째로, 마음의 향을 드려야 합니다

사무엘상 16장 7절에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함만 아니라 마음의 향을 받기 원하십니다. 보통 사람은 겉모양만 보므로 뒤에서 나를 험담하는 사람이 내 앞에서 칭찬과 아부를 하면 그냥 속아 넘어 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전혀 속지 않으십니다. 마태복음 23장에 보면 예수님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엄히 책망하셨고, 고린도전서 13장에도 사랑 없이 행하는 구제나 선행은 아무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셨지요.

만일 내가 일꾼인데도 출석체크 때문에 기도회에 참석한다면 이는 응답도 변화도 더딜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하나님과 영혼을 사랑하기 때문에 사명을 사모하고 일꾼으로 선출되기보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선출되기 원했다면 믿음의 성장이 더딜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누가 볼 때와 그렇지 않을 때, 나의 행함이 다르다면 이 또한 하나님 앞에 거짓이 됩니다. 교회에서는 거룩한 것처럼 행동을 하면서도 집에서는 거친 언행을 서슴지 않는다면 이는 온전치 못한 것입니다.

잠언 16장 2절에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깨끗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 했습니다.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인정하여 마음의 향을 드리는 사람은 열심히 마음의 할례를 이룹니다. 하나님께서는 꾀꼬리 같은 목소리로 찬양하는 것보다 음치라도 성결한 마음으로 드리는 찬양을 더 기뻐 흠향하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마음 중심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 성결한 마음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달려가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선을 좇아 행합니다

잠언 15장 3절에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 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선을 행하여 축복을 받은 믿음의 선진들이 나옵니다.

이방 여인으로, 성실하게 도리를 좇아 선을 행한 룻은 다윗 왕의 계보에 오르는 축복을 받았고, 고넬료는 이방인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기도와 구제함이 많아서 하나님 앞에 기억된바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최고의 사도인 베드로를 통해 성령을 받았을 뿐 아니라 함께 모인 일가친척, 친구들까지도 복을 받았습니다. 또한 여 제자 다비다는 생전에 선행과 구제함이 많았기에 베드로의 기도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과 사랑을 이룬 하나님 닮은 자녀를 찾아 넘치는 축복으로 함께하십니다. 선(善)이라고 해서 꼭 눈에 보이는 행함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교회와 목자를 위한 기도와 금식, 하나님을 사랑하여 힘을 다하는 충성 등도 포함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며 정도를 좇아 행하는 모든 삶을 기억하셔서 넘치는 응답과 축복으로 바꿔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시되 사람이 알지 못하는 마음과 생각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을 두려운 분으로 여겨서는 안 됩니다. 내가 진리대로 살지 못하거나 순종하지 않을 때는 하나님의 눈이 무섭고 두렵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반면에 선을 좇고 진리대로 순종할 때는 한없이 인자하고 따뜻한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마치 잘못을 숨기고자 할 때는 엄마의 눈치를 살피지만 1등 한 성적표를 받으면 그 소식을 전하기 위해 엄마를 빨리 만나기를 고대하는 것과 같지요. 그러니 말씀에 순종함으로 변화되어 하나님의 시선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시선을 받는다는 것은 이 세상의 어떤 든든한 힘과도 비교할 수 없는 축복이며(시 17:8) 어떤 어려움이나 문제도 능히 피해 가고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하루하루 삶 속에서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며(시 121:4) 나를 지키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의 시선을 받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 } ], "Result":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