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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람이 다스려야 할 몸의 행실 (4)
설교자 이수진 목사 설교본문 롬 8:12-13 날짜 2019.07.14
지난 시간에는 주님을 닮기 위해 다스려야 할 몸의 행실 중 ‘생각’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자신의 마음을 낱낱이 분석하고 깨우침으로 진리로 가득한 아름다운 마음을 만들 수 있도록 ‘마음’에 대해 증거하고자 합니다.

지난 시간에 ‘혼’이란, 머릿속의 기억장치와 그 안에 저장된 지식, 그것을 떠올리는 작용을 통틀어 말한다 했습니다. 혼 안에는 진리에 속한 혼, 곧 영의 생각과 비진리에 속한 혼, 육신의 생각이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단’이 주관하며 마음에 있는 비진리를 요동하여 악을 행하고 죄를 짓게 하지만, 영의 생각은 성령께서 주관하여 마음 안에 있는 진리를 행하게 하지요. 따라서 우리가 진리에 속한 생각만 하려면, 마음 안에 있는 비진리를 모두 빼내 버리고 진리로만 채우면 됩니다. 사단이 조종할 수 있는 비진리가 마음에 없기 때문에 비진리의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9장 4절에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하신 대로 사람의 마음에서 악한 생각이 나옴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동정녀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니라”(눅 2:19) 하신 말씀대로, 천사가 아기 예수님에 대해서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담았기에 예수님을 잘 보필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사람의 마음은 생각과 긴밀한 연관이 있을 뿐만 아니라 눈, 귀, 입, 자세와도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을 진리로 채우면 생각뿐 아니라 몸의 행실도 변화될 수 있기에 우선 마음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1. 마음의 정의

마음의 사전적인 뜻은 ‘사람이 본래부터 지닌 성격이나 품성’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의미는 ‘영 자체와 그 안에 들어 있는 영의 지식’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첫 사람 아담을 흙으로 빚으신 후 생기를 불어넣어 ‘생령’, 곧 살아 있는 영의 상태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랑, 온유, 겸손, 진실, 화평 등 진리의 지식, 곧 영의 지식을 하나하나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렇게 아담은 영의 지식으로만 채워져 있었고, 영 자체가 곧 마음이었기에 영과 마음을 구분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선악과를 먹는 불순종을 한 이후로는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지고 사단이 혼을 통해 비진리를 넣어 주게 되었습니다. 이에 영의 지식들이 빠져 나가고 그 자리에 비진리로 채워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불어넣으신 영의 기운은 완전히 소멸될 수 없는 근본의 능력이므로 ‘생명의 씨’로 마음 안에 남아 영의 흔적으로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아담이 불순종한 이후 사람의 마음은 ‘생명의 씨를 혼이 감싸고 있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즉, 사람의 마음이 진리 자체일 때는 ‘영’이라고 하지만, 육으로 변질되어 하얀 마음과 검은 마음이 섞여져 있을 때는 ‘마음’이라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을 다시 영으로 회복하려면, 마음의 비진리를 주관하는 원수 마귀 사단으로부터 공급받는 혼의 작용을 차단하고, 보혜사 성령으로부터 공급받는 진리의 지식으로 마음을 채우면 됩니다. 즉 마음속에서 비진리를 온전히 뽑아 버리고 진리로 채울 때 영의 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2. 마음의 구성 요소

성경은 마음을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명백한 진리의 마음, 둘째는 본성을 포함한 양심, 셋째는 명백한 비진리의 마음입니다.
로마서 7장 22~23절에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속사람’이란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명백한 진리의 마음, ‘내 마음의 법’은 양심을 의미하며, ‘죄의 법’이란 명백한 비진리의 마음 곧 원수 마귀 사단으로부터 심겨진 검은 마음을 의미합니다.
죄의 법인 명백한 비진리는 진리와 완전히 반대이므로 쉽게 발견하여 버릴 수 있습니다(마 15:19~20). 하지만 내 마음의 법인 양심과 본성 안에 있는 비진리는 발견하는 것이 쉽지 않으니 진리로 변화시키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3. 본성과 양심 안에 있는 비진리

본성이란 ‘각 사람이 갖고 있는 마음의 근본된 성질’을 말합니다. 이러한 본성은 부모로부터 선천적으로 물려받은 ‘기’뿐만 아니라, 후천적으로 어떤 환경에서 어떤 것을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달라집니다. 그리고 양심은 ‘본성을 바탕으로 하여 만들어진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마음’입니다.
일반적으로 양심은 선이나 악,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가치판단의 주관적인 기준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양심에 꺼리는 것은 악이고, 거리끼지 않는 것은 악이 아니라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양심은 자기 나름대로 만들었기 때문에 사람마다 다르고 시대와 나라, 문화와 지역에 따라 많은 차이가 납니다. 또 세상이 악해질수록 사람들의 양심도 점점 비진리에 더 물들고 악에 대해 무뎌집니다. 따라서 양심은 절대적인 선의 잣대가 될 수 없습니다.
이처럼 사람의 본성과 양심에는 자기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거나 주장하는 ‘의와 틀’이 있기에 그 안에 들어 있는 악의 모양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오직 날선 검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발견할 수 있기에 보편적인 몇 가지 예를 살펴보겠습니다. 세상에서는 원수를 갚아야 의로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 소설이나 무협 소설을 보면 부모의 원수를 갚는 것은 자식 된 도리로, 참으로 의롭고 멋있다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 하셨기에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 뜻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입니다.
다른 예로, 만약 친한 친구가 범죄했는데 다른 사람이 범인으로 몰려 누명을 썼을 때, 친구의 잘못을 말하지 않는 것이 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누명 쓴 사람의 억울함을 알면서도 침묵을 지킨다면, 하나님 앞에서 결코 의롭다 할 수 없습니다. 또한 남의 물건을 빌려 쓰고 돌려주지 않거나, 허락 없이 남의 것을 사용하고도 사소한 일이기에 ‘도적의 마음’이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작은 것에서부터 악이 자라나 자기의 유익만 구하거나, 도적질로도 발전할 수 있지요.
그러므로 본성과 양심까지 온전히 선으로 바꾸려면 사소한 것이라도 진리에 위배되는 것이라면 당장 고치겠다는 마음으로 자신을 돌아봐야 변화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본성 속에서 나오는 의와 틀을 살펴보겠습니다.
A는 엄한 부모 밑에서 자신의 의견을 잘 표현하지 않고 성장하였습니다. B는 자신의 의견을 잘 표현하고 리더십 있게 행동하는 성격을 가졌지요. 이 둘은 각기 다른 부모와 환경에서 성장하였기에 다른 본성과 양심을 가졌습니다. 어느 날 A와 B가 같이 일을 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진리로 변화되기 전 의견이 다를 경우, 상대가 이해되지 않고 불편하게 느껴집니다.
A는 B를 보며 ‘저 사람은 자신의 의견만 옳다고 하네. 나는 양보하는 건데 큰소리 내지 않으니까 나를 무시하나?’ 하며 불편해합니다. B는 상대방에 대해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거나 협조하지 않으면서 괜히 눈치 보게 만든다’ 하면서 감정을 갖고 싫어하지요. 이렇게 ‘나만 옳다’ 하는 자기 의가 있으면 상대를 판단하거나 불편하게 생각합니다. 사람 사이에 의견과 성격이 다를 때 다툼, 혈기, 불편함, 판단 정죄, 미움 등 마음에 있는 악이 쉽게 드러나지요. 이때 자신만 옳다 하지 말고 의와 틀, 마음의 비진리를 발견해야 신속히 변화될 수 있습니다.


4. 진리로 만든 선의 틀

목자가 양 떼를 용서하고 감싸 주는 모습에 감동을 받아 어떤 일꾼이 ‘영혼을 갈무리하려면 저렇게 해야 한다’라는 선의 틀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양 떼를 갈무리할 때 어찌하든 영혼을 용서하고 감싸 주려 합니다. 문제는 이렇게 용서만 해서는 안 되는 상황에서도 똑같은 태도를 취한다는 것입니다. 상대가 돌이키지 않으면 구원받기조차 어려운 상황일 때, 죄에서 돌이킬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 진정한 선입니다.
어떤 사람은 범죄에 대한 징계로 물질의 어려움을 겪는 사람을 구제합니다. 물론 상대의 믿음에 따라 구제하는 것이 그 영혼을 살리는 데 유익한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영혼이 죄에서 돌이키는 것을 오히려 막을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만들어 놓은 ‘선’의 기준에서 생각하니, 물질의 연단을 통한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헤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꾼은 양 떼를 지적하고 권면하는 것이 사랑이고 선이라 생각합니다. 자신은 초신자 때부터 그 정도의 말씀은 지켰기 때문에 다른 사람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요. 상대의 믿음의 분량을 고려하지 않은 채, 허물을 발견하기라도 하면 즉시 지적하고 권면합니다. 그 영혼의 마음이 어떤지, 용서하고 덮어 줘야 하는 상황은 아닌지 등 상대의 형편을 살펴 주지 못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본성과 양심에 더하여 진리로 다시 ‘선의 틀’을 만들기도 합니다. 이 또한 온전한 하나님의 뜻과는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내가 보기에는 분명히 이것이 선한데, 이것이 의로운데.’ 하면서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습니다.
물론 진리가 시시각각 달라진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물이 담는 그릇에 따라 모양이 바뀔 수 있는 것처럼 상황에 따라 진리를 적용하는 모양이 조금 달라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이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처럼 자신을 발견하고 알아가는 것은 주님을 닮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양심의 악을 버리고 마음을 선과 사랑으로 채워 하나님께로 나아가기 위해서이지요. 그럴 때 우리 마음이 진정 거룩해져 주님을 떳떳이 뵐 수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주님의 재림에 대한 사모함이 둔해졌다면 마음의 할례도 기도도 쉬게 될 것입니다. 좁은 길 가는 것이 힘들게 느껴지고 연단과 고난이 있으면 숨고 싶어지지요. 하지만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같이 깨끗한 마음으로 변화되며, 불같이 기도하고 충성하여 깨어 있는 성도들은 하루하루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릴 것입니다. 신속히 변화되어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담대히 고백할 수 있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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