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대예배

제목 십자가의 도 (12)   [막15:16-20]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23.10.22
오늘은 십자가의 섭리 중 예수님께서 왜 머리에 가시 면류관을 쓰셔야 했는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1. 사람이 생각을 통해 짓는 죄를 사하시기 위해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서 영화로운 면류관을 쓰기에 합당하십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금이나 보석으로 장식된 영화로운 면류관이 아닌 날카로운 가시 면류관을 쓰셨습니다.
마가복음 15장 16~18절에 “군병들이 예수를 끌고 브라이도리온이라는 뜰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모으고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 면류관을 엮어 씌우고 예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 했지요.
이스라엘 지역의 가시나무는 아주 길고 단단한 가시를 갖고 있습니다. 로마 군병들은 이 가시 줄기로 사람의 머리보다 약간 작은 면류관을 엮어서 예수님의 머리 위에 눌러 씌웠지요. 그 길고 독한 가시가 예수님의 머리를 파고들면서 살이 찢기는 고통과 함께 예수님의 얼굴은 피로 물들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사랑하시는 독생자 예수님에게 가시관을 쓰게 하신 것일까요? 이는 사람이 생각을 통해 짓는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한 섭리였습니다.
사람은 그 마음에 비진리가 있기 때문에 진리와 반대되는 비진리의 생각을 하게 되고 악한 감정을 품게 됩니다. 결국은 행위적인 범죄로까지 드러나지요.
그런데 세상에서는 아무리 악한 생각과 마음을 갖고 있어도 행함으로 드러나지 않으면 죄라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마음에 죄를 품는 것이나 생각으로 범죄하는 것도 죄라 하지요.
“…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8) 했고,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요일 3:15) 말씀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시관을 쓰시고 피 흘리신 까닭이 바로 이처럼 사람이 생각으로 짓는 죄까지도 사해 주시기 위함이라는 사실입니다.


2. 생각으로 죄를 짓지 않으려면

1) 태어나 자라면서 입력된 비진리의 지식을 진리의 지식으로 바꿔야 합니다
생각으로 범죄하지 않기 위해서는 먼저 ‘생각’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사람의 머리에는 지식을 담고 활용할 수 있는 기억장치가 있습니다. 태어나서부터 보고 듣고 배운 많은 것이 느낌과 함께 입력되는데, 이것이 바로 지식이지요. 이렇게 입력된 지식이 필요에 따라 재생되어 나오는 것을 ‘생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태어나 자라면서 입력된 지식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성장한 환경이 다르고 배움이 다르며, 같은 환경에서 같은 사람에게 가르침 받았다고 해도 각자가 어떤 느낌으로 받아들였는지가 다르지요. 이렇게 지식이 다르기 때문에 사람마다 가치관도 달라지고,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도 달라집니다. 같은 상황에 부닥쳤을 때 지식을 떠올려 생각하는 내용도 각각 달라지지요.
예를 들어, 똑같은 장면을 보고도 어떤 사람은 “싫다. 나쁘다.” 생각할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은 “좋다. 아름답다.”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떤 나라에서 교양 있는 행동이라 인정되는 일이 다른 나라에서는 예의에 벗어난 행동이라고 비난받을 수도 있지요. 이렇게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뿐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하는 생각은 하나님의 진리와 맞지 않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맨 처음 아담이 에덴동산에 살 때 아담에게는 진리의 지식만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진리만을 가르쳐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담이 범죄한 후에는 그 마음에서 진리의 지식이 빠져나가고 대신 비진리의 지식이 채워졌습니다.
사단은 사람의 마음에 있는 비진리를 주관해서 하나님 뜻과는 반대되는 생각을 하도록 만들어 갑니다. 예를 들어, 동료가 공로를 세워서 많은 사람 앞에서 칭찬받으면 사단은 그 상황에서 비진리를 주관해 악한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저 사람이 혼자 일해서 공을 세운 것이 아닌데 혼자 칭찬받네.’ 불만을 품거나 ‘나도 똑같이 고생하는데 왜 저 사람만 인정받는가.’ 낙심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진리의 지식만 있다면 사단이 그 생각을 주관하지 못하므로 ‘저 사람이 칭찬받으니 좋다. 나도 더 열심히 해야겠다.’ 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사람이 진리의 지식만 자기 안에 담아 왔다면 진리의 생각만 할 수 있으나, 태어나서부터 비진리의 지식을 쌓으며 살아왔기에 그 비진리가 재생되어 나오는 생각도 비진리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고 나서는 먼저 지식을 진리로 바꿔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생각 또한 진리의 생각으로 바뀔 수 있지요. 이를 위해서는 하나님 말씀을 부지런히 듣고 양식 삼아야 합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고 오직 ‘예’와 ‘아멘’으로 말씀을 마음에 받아 자신을 변화시켜 나가야 하지요.

2) 하나님 뜻과 반대되는 육신의 생각을 깨뜨려 버려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 지식과 경험에 맞지 않으니 하나님 말씀을 믿지 못하고 그 뜻과 반대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 뜻과 반대되는 생각을 ‘육신의 생각’이라고 하는데, 사람에게 이 육신의 생각을 하도록 하는 것이 사단이지요.
성경에 보면, 베드로가 육신의 생각을 동원함으로 예수님께 책망받은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장차 하나님 섭리 가운데 십자가 지실 것을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주여 그리마옵소서” 한 것입니다. 그는 사랑하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안타까운 마음으로 말했던 것이지요.
육신의 생각 속에서 들으면 선하고 의로운 말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지요. 하나님 뜻과 반대로 생각하도록 육신의 생각을 주는 것이 바로 사단의 역사임을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육의 사람 입장에서는 지혜롭고 선한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8장 7절에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했지요.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므로 하나님과 상관없으며, 이를 깨뜨려야만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영적인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할 수 있지요. 하나님의 능력은 사람의 지식과 생각을 초월하며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사람이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지 않고 순종하면 무한하신 하나님의 권능을 항상 체험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육신의 생각을 동원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의뢰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역사해 주십니다. 문제는 사람이 육신의 생각을 동원함으로 하나님만 의뢰하지 못하고 사람의 지혜와 방법을 동원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사람의 이론과 지식 가운데 하나님 말씀을 믿지 못하게 하며 순종치 못하게 하는 생각들이 다 육신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육신의 생각을 수없이 하면서 살아가고 있으니, 모두가 하나님과 원수 된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0장 5절에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라고 말씀한 대로 모든 이론을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주님께 복종시켜야 합니다. 즉 하나님을 대적하는 육신의 생각을 버리고, 이제까지 옳다고 생각해 온 지식도 하나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은 다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진리의 생각이 되고, 하나님 뜻에 맞는 생각으로 바뀌게 됩니다.

3)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버려야 합니다
생각으로 짓는 죄를 버리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마음을 거룩하게 해야 합니다. 요한일서 2장 16절에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한 대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버려야 하지요.
마음에 악이 있고 세상을 좇는 속성들이 가득할 때는 아무리 진리의 생각을 하려고 해도 육신의 생각들이 떠오르기 마련입니다. 육신의 정욕이 있으면 세상 정욕이 좋아 보이고, 그것을 좇아 취하고 누리기를 원하지요. 육신의 정욕이 있기 때문에 육체의 일들을 행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갈 5:19~21).
안목의 정욕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을 통해 마음이 동요되고 육의 것들을 추구하게 만드는 속성입니다. 사람들은 안목의 정욕이 있기 때문에 점점 더 세상적이고 정욕적인 것들을 추구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생의 자랑은 현실의 모든 향락을 좇아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 자랑하려는 속성입니다. 이로 인해 높아지고 인정받고자 하며 명예와 권세 등을 취하려고 하는 것이지요. 마음에서부터 이러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버리면 생각할 때도 육신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영의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3. 예수님께서 가시관을 쓰심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천국의 면류관

예수님께서 가시 면류관을 써 주셨기에 우리는 장차 천국에 가서 좋은 면류관을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천국의 면류관은 이 땅에서 어떠한 삶을 살았느냐에 따라 여러 종류로 나뉩니다.
고린도전서 9장 25절에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했습니다. 여기서 ‘썩지 아니할 면류관’은 주님을 영접해 진리를 들음으로 죄를 싸워 버리려고 노력한 사람에게 주어지지요.
베드로전서 5장 4절에 나오는 ‘영광의 면류관’은 죄를 싸워 버리고 말씀대로 살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린 사람에게 주어지는 면류관입니다. 야고보서 1장 12절과 요한계시록 2장 10절에는 ‘생명의 면류관’이 나오는데, 하나님을 사랑해 죽기까지 충성하며 악은 모양이라도 버림으로 성결된 사람에게 주어지지요.
사도 바울처럼 온전히 성결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으로 사명을 잘 감당한 사람들은 디모데후서 4장 8절에 나오는 ‘의의 면류관’을 받습니다. 요한계시록 4장 4절에는 천국의 장로들이 쓰는 ‘금 면류관’이 기록돼 있는데, 천국의 장로들이란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인정하시는 장로들로서 온전히 성결되고 온 집에 충성하며 정금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땅에서 얼마나 성결되었는가, 얼마나 충성했는가에 따라서 각기 다른 면류관을 주십니다. 특히 ‘의의 면류관’이나 ‘금 면류관’은 하나님 앞에서 가장 인정받는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이들은 천국에서 해와 같이 빛나는 영광을 누리게 되지요. 예수님께서 고통스러운 가시 면류관을 쓰심으로 우리가 생각으로 짓는 죄를 대속하셨을 뿐 아니라 장차 천국에서는 이처럼 좋은 면류관들을 쓸 수 있게 해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러한 예수님의 사랑을 깨달아 생각으로 짓는 모든 죄를 벗어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말씀을 의심하게 만들고 순종치 못하게 가로막는 육신의 생각을 깨뜨려 버리므로 영의 생각, 선한 생각만 하시고 하나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리하여 하루빨리 신부단장을 이뤄 신랑 되신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가장 영화로운 면류관을 받아 쓰고서 세세토록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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