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대예배

제목 십자가의 도 (15)   [눅 23:33-34, 42-43]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23.11.12
오늘부터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때부터 운명하시는 순간까지 남기신 일곱 가지 말씀인 ‘가상칠언’에 대해 전하겠습니다.

가상칠언 1.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3~34)

예수님께서 참혹한 십자가의 형벌을 당하신 것은 바로 저와 여러분의 죄 때문입니다. 죄인으로서 형벌을 받아야 했던 인류를 대신해 예수님께서 모든 고통을 겪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지 못하는 군중들은 마치 예수님을 흉악한 죄인인 것처럼 멸시하고 조롱했습니다. 로마 군병들 또한 죄인을 대하듯이 예수님을 거칠게 끌고 가서 잔인하게 십자가에 못 박았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원망하거나 저주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며 그들을 위해 중보 기도를 올리신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의 기도는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못 박고 조롱하는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어둠 속에 거하는 모든 인류를 위한 기도이며 지금도 주의 이름을 멸시하고 핍박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 올리신 기도였지요. 이러한 예수님 사랑의 간구 때문에 주를 알지 못했던 저와 여러분이 용서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를 믿는 우리도 모든 사람을 용서하기를 원하십니다. 애매히 핍박받거나 손해 볼 때도 악으로 대항하거나 감정을 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선으로 대해 주기를 원하시지요. 세상의 어둠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빛 가운데 사는 사람들을 싫어합니다. 그 빛으로 인해 자신들의 악함이 드러나는 것이 싫고, 그로 인해 마음에 찔림이 되는 것이 싫기 때문입니다(요 3:20).
하나님의 대적 원수 마귀 사단은 복음이 세상에 전파되어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을 싫어하므로 전도자들을 핍박하도록 악인들을 사주합니다(마 10:22). 성도들이 믿음을 잃고 낙심하게 만들기 위해 세상 사람들을 통해 고난을 주기도 하지요. 이때도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원수까지도 사랑하여 생명을 주신 것처럼 우리도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므로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기를 원하십니다(마 5:44~45). 주기도문에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하지요.
구세주를 십자가에 못 박고 조롱하는 죄인들까지도 사랑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형제를 사랑하며 원수까지도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가상칠언 2.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2~43)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예수님의 좌우편에는 강도들이 십자가의 형벌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중 한 강도는 예수님을 향해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했지요. 정말 구세주라면 예수님 자신은 물론 못 박힌 강도들도 구해 보라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이때 반대편의 강도가 그를 꾸짖습니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의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했지요. 자신들은 죄인이니 당연히 형벌을 받지만,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간청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 믿음을 보시고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약속해 주십니다. 이 강도는 죽기 직전, 마지막 순간에나마 예수님을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함으로 구원을 약속받은 것입니다. 이 말씀 안에는 많은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먼저 천국의 ‘낙원’에 대해 알려 주십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이 본 천국에 대해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하며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했습니다(고후 12:2, 4).
느헤미야 9장 6절을 비롯해 성경 곳곳에는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 ‘하늘의 하늘’ 등의 표현이 나오므로 여러 하늘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육의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영의 세계 하늘들이 있는 것이지요. 바로 사도 바울이 본 셋째 하늘은 천국이 있는 공간이며, 그중에서도 특별히 낙원이라는 장소를 따로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10~11절에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 했습니다. 새 예루살렘은 천국 안에서도 특별히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성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천국 안에서도 낙원이나 새 예루살렘 등 처소들이 구분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새 예루살렘’은 천국 중에서도 가장 위 단계로 하나님 보좌가 있으며, 주님의 형상을 닮아 죄와 악을 온전히 벗어 버리고 온 집에 충성한 사람들이 들어갑니다. 구원받은 강도의 경우는 죽기 직전에 주님을 영접했기에 죄악을 버릴 시간도 없었고 충성한 것도 없이 구원의 자격만 간신히 얻었을 뿐입니다. 믿음으로 심은 것도 행한 것도 없으니, 천국에서 받을 상도 없지요. 이런 사람들은 천국 중에서도 가장 낮은 처소인 ‘낙원’에 가게 되는 것입니다.
낙원과 새 예루살렘 사이에도 천국이 여러 단계로 나뉘어 있어서 각 사람의 마음이 성결 된 정도에 따라, 믿음과 충성에 따라 거하는 처소가 달라집니다. 이처럼 천국이 분류된 것은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게 하시고 사람이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공의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에서 영원히 살 처소 또한 사람이 이 땅에서 행한 것에 따라 달라집니다. 이 땅에서 얼마나 죄를 버리고 거룩하신 주님의 형상을 닮았는가에 따라 처소가 달라지지요. 각각의 처소마다 그 안에 거하는 사람들의 영광이 다르며, 상급과 행복과 권세가 달라집니다(고전 15:41). 그래서 정녕 믿음이 있다면 어찌하든 더 좋은 천국에 들어가기를 사모해야 합니다(마 11:12).

예수님께서는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도 낙원에 가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천국에서 주님께서 거하시는 처소는 가장 아름다운 새 예루살렘에 있지요. 그러나 주님께서는 천국 전체의 주인이시며 모든 천국에 거하시는 분입니다. 낙원에도, 새 예루살렘에도, 어느 곳에도 거하시며 천국의 모든 일을 알고 계시며 통치하시지요.
‘오늘’이라는 것도 십자가에 달리신 바로 그날 예수님께서 낙원에 가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강도가 믿음으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바로 그 시점부터는 그가 어느 곳에 있든지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의미이지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그날, 즉 금요일에는 어디로 가셨을까요? 마태복음 12장 40절에 “…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으리라” 했고, 에베소서 4장 9절에 그리스도께서 땅 아랫곳으로 내리셨다고 했습니다. 베드로전서 3장 19절에는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했지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후 낙원이 아닌 옥에 있는 영들에게 가셔서 복음을 전파하신 것입니다. ‘옥에 있는 영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구세주가 되시기 전에 죽은 영혼 중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영혼들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아야만 합니다. 나름대로 아무리 선하게 살았다고 해도 모두가 원죄를 타고 난 죄인이며 율법대로 행하지 못하고 자범죄를 범하게 되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만이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고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은 다 구원받지 못하고 지옥에 갔을까요? 또 예수님 이후에도 복음을 한 번도 듣지 못해서 믿지 못한 사람들은 다 지옥으로 가야 할까요?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이시며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비록 주님 이전의 사람들이나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구원받을 길을 예비해 놓으셨지요.
복음을 전혀 듣지 못한 사람 중에도 선한 마음 가운데 창조주를 인정하고 선하게 살아간 경우가 있습니다. 선한 양심 가운데서 내세, 곧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율법을 듣지는 못했어도 나름대로 양심에 따라 선하게 살아가는 것이지요(롬 2:14~15).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양심이 있어서 선한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해도 양심의 소리를 좇아 살아갑니다. 악에 물들지 않으려고 애쓰며 나름대로 선하게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선한 양심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 욕심을 좇아서 헛된 우상이나 귀신을 숭배하는 것이 아닙니다. 막연하게나마 한 분인 조물주를 인정하며 사람의 도리를 좇아 살아가지요. 만약 이런 사람이 복음을 들었다면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했을 것입니다.
반면, 아무리 선하게 보인다 해도 복음을 듣고도 믿지 않은 사람은 그 양심이 악해 구원받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양심을 밝히 알 수 없지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마음과 행위를 아십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오시기 이전에 사람 중에서도 만약 복음을 들었다면 믿었을 만한 양심을 구별해 내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양심 심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양심 심판에 의해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들의 영혼을 예수님께서 구세주가 되실 때까지 윗음부에 머물면서 안식하게 하셨습니다. 구약 시대에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서 구원받은 영혼들도 윗음부에 머물고 있었지요.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가 나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은 부자는 죽어서 음부의 불 속에서 고통받지만, 하나님을 경외했던 나사로는 아브라함 품에서 안식을 누리지요. 아직 예수님께서 구세주가 되시기 전이기에, 즉 십자가를 지시기 전이기에 천국에 가서 주님의 품에 안기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안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때 부자가 고통받는 곳은 아랫음부이고, 나사로가 안식하는 곳은 윗음부입니다. 아랫음부는 어둠의 영역으로 지옥의 일부인 반면 윗음부는 천국과 마찬가지로 빛에 속한 영역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운명하신 후 옥의 영들, 곧 윗음부의 영혼들을 찾아가셨습니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말씀한 대로 그들에게도 구원의 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셔야 했지요. 바로 이때 윗음부에 있던 영혼들도 비로소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여 모든 죄를 사함 받을 수 있었고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운명하시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오직 우리를 구원하여 천국으로 인도하시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지금도 우리를 위해 처소를 예비하고 계시지요. 이처럼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생명까지 주시고 항상 좋은 것만 주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더욱 밝히 깨달아 날마다 더 좋은 천국을 열심히 침노해 들어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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