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대예배

제목 십자가의 도 (16)   [요 19:26-27, 마 27:46]
설교자 이재록 원로목사
등록일 2023.11.26
오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때부터 운명하시는 순간까지 남기신 일곱 가지 말씀 ‘가상칠언’ 중 세 번째와 네 번째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가상칠언 3.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요 19:26~27)

예수님께서는 동정녀 마리아에게 그 곁에 선 제자 요한을 가리켜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말씀하십니다. 요한을 아들처럼 여기라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어머니여” 하신 것이 아니라 “여자여” 하고 부르셨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26절에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섰다’ 한 것은 제자 요한의 입장에서 기록한 것이지요.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를 어머니라 부르신 기록이 없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실 때도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하여 마리아를 향해 “여자여” 하고 부르셨습니다. 이는 동정녀 마리아가 결코 예수님의 어머니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근본 하나이며 삼위일체 하나님 중 한 분입니다. 출애굽기 3장 14절에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있는 자’라 말씀하셨습니다. 누군가 하나님을 낳은 것도 아니요 하나님을 만들어 낸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 전부터 영원 후까지 스스로 계신 분이지요. 그러므로 근본 하나님의 본체인 예수님께서 피조물인 동정녀 마리아에게 “어머니”라 부를 수 없는 것입니다.
유전적으로도 동정녀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잉태될 때는 아버지의 정자와 어머니의 난자가 결합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몸을 빌어나셨을 뿐 잉태될 때는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되셨지요. 아기가 인큐베이터 안에서 자랐다고 해서 인큐베이터가 아기의 부모가 될 수 없듯이 마리아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의 어머니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께서 동정녀 마리아에게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신 것은 마리아를 위로하고 계시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예수님께서 고난 겪으시는 것을 보며 마치 칼로 마음을 찌르는 듯한 고통을 받는 마리아에게 마지막 순간까지 위로하시며 제자 요한을 친아들처럼 의지하게 하신 것입니다.
또한 요한에게는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심으로 마리아를 어머니처럼 섬기도록 당부하셨지요. 그때부터 요한은 동정녀 마리아를 자기 집에 모시며 어머니와 같이 섬겼습니다. 마리아는 동정녀로서 예수님을 낳은 후, 남편인 요셉과 동침하여 여러 자녀를 낳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자녀들이 아니라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시며 “네 어머니라”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참된 소속이 어디인지를 깨달아 알아야 합니다. 구원받은 우리는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천국 백성입니다(빌 3:20). 사람이 주님을 영접하는 순간, 마치 아이가 태어났을 때 출생 신고를 하는 것처럼 그 이름이 천국의 생명책에 기록되지요. 생명책에 기록된 천국 백성의 아버지는 하나님이시며 천국 백성의 참된 형제자매는 주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면 분명히 육의 부모가 우리를 낳았는데 왜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라고 하는 것일까요? 우리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에게서 왔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몸을 낳은 것은 육의 부모이지만 근본적으로 부모의 정자와 난자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지요. 아버지의 아버지, 그 아버지, 계속해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우리의 조상은 아담이고, 인류의 시조인 아담의 생명은 하나님에게서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아담의 몸을 만드시고 그 안에 생기를 불어넣으셨지요. 그러니 근본적으로 우리 생명은 하나님에게서 왔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사람이 결혼해 자녀를 낳는다고는 해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생명을 잉태할 수가 없습니다. 잉태된 아이에게 영혼을 주시는 것도 하나님의 소관이지요. 아무리 유전 공학이 발달한다 해도 사람의 영혼을 만들어 낼 수는 없습니다. 잉태된 자녀의 성별이나 성품, 외모도 부모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오직 하나님만이 사람의 생명을 주관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지 않고 세상 정욕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없습니다. 성경에는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 “너희 아비 마귀”라고 말씀합니다(요 8:44). 세상 사람들은 마귀가 미혹하는 대로 범죄하며 살다가 세상 끝 날에는 지옥 불에 던져지지요. 반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성도들은 영원히 천국에서 삽니다.
그러니 이 땅에서는 서로 혈연관계로 맺어진 가족이라고 해도 주님을 믿지 않는 가족은 천국에서 영원히 함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삶을 마치면 지옥과 천국으로 나뉘어져 그 가는 길이 영원히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2장 48~50절에도 예수님께서 “…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가라사대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하셨습니다. 주를 믿는 성도들이야말로 장차 천국에서 영원히 함께 살게 될 참된 가족임을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말이 육의 부모, 형제를 사랑하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육의 가족을 당연히 사랑하고 섬기되, 다만 이 사랑이 하나님 앞에 합당한 영적인 사랑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가족이 하나님을 훼방하고 하나님 뜻과 반대되게 행하도록 하는데 가족에게 맞춰 준다면 이는 참된 사랑이 아니라 함께 사망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0장 37절에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했습니다. 반드시 진리 안에서 사랑하고 섬겨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무엇보다도 그들도 함께 구원받고 천국에 갈 수 있도록 전도해야 하지요. 그래서 영원한 천국에서 함께 살 수 있는 진정한 가족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가상칠언 4.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예수님께서는 제 삼시, 즉 우리 시간으로 아침 아홉 시경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막 15:25). 그래서 제 구시가 되었다면 혹독한 고통 속에 피를 흘리시면서 여섯 시간째 매달려 계셨다는 말이지요.
혹자는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신 말씀을 두고 ‘예수님께서 심한 고통으로 인해 하나님을 원망하시는가 보다.’ 하고 오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원망하시거나 고통으로 인해 탄식하신 것이 절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시기 전부터 이미 앞으로 될 일을 다 아셨고 십자가의 고통에 대해서도 다 아셨습니다. 그러면서도 아버지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기 위해 기꺼이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셨지요. 그런 예수님께서 더구나 모든 고통이 끝날 때가 되었는데, 이제 와서 하나님을 원망하실 리가 없습니다. 이 말씀에는 원망이나 탄식이 아니라 중요한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실 때 ‘크게 소리 질러’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소리 지르실 만한 기운이 남아 있지 않으신 상태였지요. 밤새 끌려다니며 심문을 받으셨고, 심한 채찍질을 당하신 후 몇 차례나 쓰러지시면서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고, 여섯 시간을 피 흘리며 매달려 계시니 작은 소리로 말씀하시기도 힘든 상황이었지요. 그런데 힘을 다해 큰 소리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로 모든 사람이 이 말씀을 듣고 깨달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버림받으셔야만 했는지’, ‘왜 참혹한 십자가에 못 박히셔야만 했는지’ 모든 사람이 듣고 깨닫기를 원하신 것이지요.
지금 예수님께서는 저주받은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하나님으로부터 철저히 버림받으신 상태입니다. 그 이유는 죄인 된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스스로 홀로 이 짐을, 죄의 짐을 지신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율법의 저주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을 운명이었는데 예수님께서 그 저주를 대신 받으시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으신 것이지요. 지옥으로 갈 수밖에 없는 우리를 구원하여 천국에 인도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대신 돌아가신 것입니다. 바로 이 의미를 모든 사람이 알기 원하시므로 온 힘을 다해 외치신 것이지요.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부르실 때, 항상 친근하게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기 시작하면 처음에는 “하나님”이라고 부르다가 믿음이 자라는 만큼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아버지이심이 마음에서 믿어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아버지”라는 표현을 쓰게 되는 것입니다.
더 깊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통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라는 호칭도 잘 붙이지 않고 그냥 “아버지”, “아바 아버지”라고 표현합니다. 너무나 다정하고 사랑스러운 아버지이시기에 굳이 “하나님”이라는 말도 잘 붙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과의 사이의 개인적이고 친밀한 관계가 이뤄진 것이지요. 많은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대표 기도를 할 때는 믿음이 크고 작은 여러 사람을 대표하는 것이니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항상 깊은 사랑을 나누셨고 기도하실 때도 늘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유독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는 바로 저주받은 죄인의 입장에서 하나님을 부르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인류의 모든 저주를 대신 지시고 죄인의 신분으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향해 죄인이 감히 “아버지”라 부를 수 없으니, 예수님께서도 죄인들을 대신해 버림받고 십자가에 달리셨음을 말씀하시는 장면에서는 “아버지”라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이라 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죄 가운데 살 때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당하게 기도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뜻대로 살지도 않고 하나님의 대적 원수 마귀 사단이 미혹하는 대로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담대하게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으며, 아버지라 부른다고 해서 응답이 오는 것도 아니지요. 하나님께서도 “너는 정녕 내 자녀라.” 내 아들이고 딸이라 인정하실 수 없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모든 영광을 다 버리고 죄인들과 같이 버림받으신 이유를 깨닫게 하시고자 힘을 다해 큰 소리로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나를 버리신 줄 아느냐?”, “내가 이처럼 버림받은 것은 바로 너희를 사랑하여 너희 죄를 대속하기 위함이라” 하고 모든 사람에게 알리기를 원하시는 것이지요.
이렇게 크게 외치신 또 다른 이유는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위해 독생자까지 내어주셨건만 여전히 수많은 사람이 이를 알지 못하고 세상과 짝해 사망의 길로 가기 때문입니다. 모든 영혼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를 알아서 구세주로 영접하고 생명을 얻기를 원하심으로 큰 소리로 외치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께서 남기신 모든 말씀을 깨닫고 마음에 깊이 새기심으로 날마다 하나님 앞에 합당한 삶을 살 수 있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래서 장차 천국에서도 가장 영광스러운 처소에서 영원히 주님과 함께 거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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