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저녁 예배

제목 욥기 강해 (33)   [욥 14:7-16]
설교자 직무대행 이수진 목사
등록일 2022.12.11
오늘은 풍요롭고 화려했던 지난날을 회상하며 하나님 앞에 호소하는 욥의 모습을 보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말씀드리겠습니다.

1. 영적으로 무지하여 천국 소망이 없는 욥

“나무는 소망이 있나니 찍힐지라도… 새로 심은 것과 같거니와 사람은 죽으면 소멸되나니 그 기운이 끊어진즉 그가 어디 있느뇨”(욥 14:7~10)
지금까지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탄식하며 이리저리 말을 해 보았지만 아무 응답이 없자 한풀 꺾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힘없고 연약한 여인에게서 난 자라며 인생의 비참함을 설명하더니 이제는 감히 하나님을 깨우쳐 주기 위해 나무를 비유 들고 있습니다.
“나는 나무보다도 못한 사람이니 긍휼히 여겨서 이제 좀 봐주십시오.”라고 자신의 초라함을 하소연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무를 잘라내면 그곳에서 다시 움이 나고 가지가 끊임없이 자라나 새로 심은 것처럼 번성합니다. 또 나무의 뿌리가 땅 밑에서 오래되면 자연히 늙어지는데 그 위의 가지는 여전히 살아있습니다. 어떤 나무는 줄기가 흙 속에 박혀 있을지라도 거기에서 또 움이 돋고 가지가 뻗어 나가지요. 그런데 사람은 죽으면 그대로 소멸되기 때문에 욥은 소망이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그 기운이 끊어진다”는 것은 사람에게 있던 힘, 즉 명예, 권세 등 이 죽음과 함께 무로 돌아가 버린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호흡이 끊어지면 몸은 흙으로 돌아가지만, 주님이 공중에 강림하실 때 다시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여 공중으로 끌어 올려집니다. 사람이 죽어도 영혼은 소멸되지 않고 천국 대기장소에 머물다가 주님 강림하실 때에 신령한 몸으로 부활한 자신의 몸과 결합하여 영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20에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라고 하여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죽으면‘잠잔다’ 말씀하는 것이지요.

“물이 바다에서 줄어지고 하수가 잦아서 마름같이 사람이 누우면… 눈을 뜨지 못하며 잠을 깨지 못하느니라”(욥 14:11~12)
바다의 물은 수증기로 올라가는 것 같지만 비가 되어 다시 내려옵니다. 산골짜기에서 시작되는 실개천이 모여 시냇물이 되고, 시냇물은 흘러 강으로 가고, 강물은 또 흘러서 바다로 갑니다. 그러니 천년이 지나고 만년이 지나도 바다의 물은 줄어들지 않습니다. 만일 바닷물이 줄어들 정도라면 냇물이나 강물은 아예 말라 버리게 되지요.
욥은 학식과 지혜가 뛰어난 사람이었기에 바닷물이 줄어들지 않는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만일 바닷물이 줄어든다면 당연히 하수가 잦아서 마르게 된다는 근본 원리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욥은 ‘사람이 죽으면 다시 일어나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틀린 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죽으면 일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다시 오실 때에 부활하고 영생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늘이 없어지기까지 눈을 뜨지 못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흔히 세상 사람은 어떤 일이 도저히 안 될 때 “천지가 개벽해도 이건 불가능하다”라는 표현을 합니다. 욥 역시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나는 일은 천지가 개벽해도 안 되는 일이다”라는 의미로 말하고 있습니다.
욥은 육적으로는 지식이 높은 사람이었지만 영적으로는 너무나 무지하므로 계속해서 진리에 맞지 않는 말들을 하고 있습니다.


2. 하나님께 호소하는 욥

“주는 나를 음부에 감추시며 주의 진노가 쉴 때까지 나를 숨기시고 나를 위하여 기한을 정하시고 나를 기억하옵소서”(욥 14:13).
하나님께서는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를 통하여 우리에게 음부에 대해 알려 주고 계십니다.
부자는 이 땅에서 호화로이 즐기며 살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기에 죽은 후에 아랫음부에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게 됩니다. 반면에 부자의 대문 앞에서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 살았던 거지 나사로는 하나님을 경외하였기에, 죽은 후 윗음부에 있는 아브라함의 품에서 평안하게 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욥은 영의 지식이 부족하기에 단지 음부를 죽은 자들이 영원히 잠자는 장소로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아무것도 없는 무 상태인 음부에, 즉 죽음 가운데 자신을 감추어 달라는 것입니다.
욥은 철없던 어린 시절의 죄를 가지고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자신을 이렇게 고통 속에 살아가게 만드셨다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마음대로 예정 가운데 자신을 엉망으로 만드셨지만 ‘언젠가는 하나님의 진노가 누그러질 날이 오지 않겠는가’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노가 풀릴 때까지 기한을 정해 주세요. 그때까지 나를 감추어 두셨다가 그 기한이 차면 나를 기억해서 다시 살려 주세요.” 이렇게 간청하는 것이지요.
사람들 중에도 어려움을 만났을 때 “이 괴로움이 언제 끝날는지 안다면 그 소망을 가지고 잘 참을 텐데, 끝을 모르니 막막하고 더 힘들다” 생각하기도 합니다.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잠들어 있었으면 좋겠다” 말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연단의 기한이나 연단 방법, 해결 방법을 다 알려주시면 진짜 시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욥은 “이 어려움을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 그 끝이 언제인지 알려주세요. 그리고 이런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저를 잊지 말아주세요.” 호소하고 있습니다. 나무는 죽은 것 같아도 다시 움이 트지만 욥은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니 불쌍히 여겨 달라는 것이지요. 가치 없는 여인에게서 태어난 존재인데다가 엉망진창이 된 몸으로 살다가 죽으면 다시 소망이 없는 심히 불쌍한 자이니 끝에 가서라도 자신을 기억해 두셨다가 다시 살려 달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리이까 나는 나의 싸우는 모든 날 동안을 참고 놓이기를 기다렸겠나이다”(욥 14:14)
앞절에서는 자신이 죽어 음부에 있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기억하여 다시 살려 달라고 했던 욥이 이제는 사람이 죽으면 다시는 살 수 없다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말이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지만, 이는 욥의 안타까운 심정이 담긴 말입니다.
욥은 영계의 법을 알지 못하니, 한 번 죽으면 끝나는 것이 인생이라 생각합니다. “나의 싸우는 모든 날 동안을 참고 놓이기를 기다렸겠나이다”라는 것은, 욥이 만일 나무처럼 사람이 죽었다가도 다시 살아난다는 소망이 있다면 어찌 하나님을 원망했겠느냐는 것입니다. 즉 자신이 다시 살 수 있다면 참고 기다렸겠는데 그렇지 않고 죽으면 끝날 뿐이니 그동안 참지 않고 마음에 서운한 대로, 내키는 감정대로 말한 거라고 자신을 변호하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믿음이 있는 사람은 어떤 시험 환난이 온다 해도, 받은 은혜를 잊지 않습니다. 영원한 천국이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원망과 탄식의 말로 하나님을 서운케 하지 않으며 오히려 기뻐하고 감사함으로 승리하지요. 만일 시험 환난이 왔을 때 기쁨과 감사가 떠나고 넘어져 버렸다면, 이는 내가 마음으로 온전히 믿지 못하였다는 증거입니다.
욥은 성령을 받지 않은 상태라서 깨달음도 없고 자기감정대로 분출하고 있지만, 성령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성령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으니 어떤 시험 환난이 와도 감사하며 믿음으로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화려했던 과거를 추억하는 욥

“주께서는 나를 부르셨겠고 나는 대답하였겠나이다… 그러하온데 이제 주께서 나의 걸음을 세시오니 나의 죄를 살피지 아니하시나이까”(욥 14:15~16)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의존하면서 살아갑니다. 어떤 이들은 물질과 권세를, 어떤 이들은 명예 또는 지식을, 어떤 이들은 가족을 의존합니다. 또 “나는 아무도 안 믿고 오직 내 주먹만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요.
그런데 사람은 내일 일을 알 수 없고 권세도, 명예도, 지식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많은 재물을 쌓았다 해도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도 있고, 하나님께서 영혼을 부르시면 빈손으로 천국과 지옥 중 한 곳으로 가야 합니다. 그러니 잠언 27:1에 “너는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 말씀하는 것입니다. 가장 복된 길은 바로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의존하는 것이지요.
욥이 예전에는 하나님을 의존하는 마음으로 때를 따라 번제를 드리곤 했습니다. 그런데 선진들로부터 들은 대로 번제를 드리긴 했지만 욥은 실제로 하나님을 만난 적도 음성을 들은 적도 없었습니다.
게다가 지금에 와서는 아무리 하나님을 찾아도 하나님께서 대답하지도 않으시고 만나 주지도 않으십니다. 만일 욥이 하나님을 만난 체험이 있다면 본문에 “하나님께서는 나를 부르셨고 나는 대답하였나이다”라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런 체험이 없었기 때문에 “주께서는 나를 부르셨겠고 나는 대답하였겠나이다”라고 추측성의 표현만을 하는 것이지요.
욥은 어떻게든지 하나님을 설득해 보려고 자신의 과거에 화려했던 순간을 하나님께 설명하고 있습니다. 욥이 예전에는 부귀, 학식, 건강 등을 모두 갖추고 사람들을 덕으로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 그때는 하나님이 얼마나 자기를 아껴 보셨겠느냐는 것입니다.
욥은 직접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만난 것은 아니지만 과거에 자신이 누린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셨던 것이니 “하나님이 나를 만나 주시고 말씀하셨던 것이 아닙니까?” 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자기를 아껴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인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하나님은 아무리 찾고 기다려도 응답이 없는 나쁜 하나님이라는 오해가 담긴 말입니다.
욥을 사랑스럽게 보시며 아껴 주셨던 하나님이 이제는 마음이 변해 욥의 지난 발자취를 더듬어 오면서 어린 시절에 지은 죄까지 일일이 계산하여 이렇게 고통 중에 거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하나님이 저를 사랑하셔서 풍요롭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스럽게 저를 바라보셨나요? 그래서 욥아! 하고 부르시면 제가 대답했겠지요. 그런데 이제 와서는 나를 이렇게 비참하게 버리셨는데 그 까닭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따져 묻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욥은 내세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천국 소망을 가질 수 없고 연단 중에 원망, 탄식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저와 여러분은 천국에 대해 밝히 알고 있으며, 무엇보다 새 예루살렘을 향한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새 예루살렘에서 누릴 영광을 소망하며 모든 연단을 믿음으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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