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저녁 예배

제목 욥기 강해 (34)   [욥 14:17-22, 15:1-3]
설교자 직무대행 이수진 목사
등록일 2023.02.05
오늘은 하나님의 사랑을 오해하는 욥의 말과 엘리바스의 변론을 살펴보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뜻을 말씀드리겠습니다.

1. 하나님의 사랑이 변했다고 오해하는 욥

“내 허물을 주머니에 봉하시고 내 죄악을 싸매시나이다”(욥 14:17)
사람은 귀하고 소중한 것을 분실하지 않기 위해 주머니에 넣어 잘 봉합니다. 마찬가지로 허물과 죄악을 봉하고 싸맨다는 것은, 그것을 가볍게 보지 않고 중대하게 보며, 단단히 관리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욥의 걸음을 일일이 세는 것조차도 부족하여, 허물과 죄악을 봉하고 싸매서 도가 넘치게 중죄인처럼 다스리신다는 것이지요.
마치 사랑이 변해버린 남편에게 슬픈 고백을 하는 아내처럼, 욥은 하나님을 향해 하소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저는 서로 사랑을 주고받았었는데, 어느 순간 하나님이 저를 미워하기 시작하시더니 나의 모든 것을 거둬가셨습니다. 가만히 보니까 하나님께서 저를 미워하여 중죄인 취급을 하시는 것은 저의 어린 시절의 죄를 하나하나 들춰내시는 까닭이지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고통스럽고 힘든 일을 만난다 해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을 남편으로 표현하실 때도 있습니다. “이는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사 54:5) 말씀했고, 특히 아가서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사랑하는 연인의 관계, 신부와 신랑의 관계로 비유하고 있지요.
하나님은 욥을 지극히 사랑하는 신랑이시기 때문에 아름다운 신부로 만들고자 연단을 허락하신 것인데, 욥은 나쁜 하나님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2. 사람의 소망을 끊어 버리시는 하나님으로 오해하는 욥

“무너지는 산은 정녕 흩어지고 바위는 그 자리에서 옮겨가고 물은 돌을 닳게 하고 넘치는 물은 땅의 티끌을 씻어 버리나이다…”(욥 14:18-19)
전에는 욥이 큰 산과 같은 명예가 있었고 부유했으며 권세도 있었습니다. 몸도 바위처럼 건강하고 자녀들도 많았으며, 뭇사람으로부터 존경받는 사람이었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웅장한 산과 바위를 무너뜨려 버리시니 이제는 아무 쓸모가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시냇물이 수십 년, 수백 년 흐르다 보면 이 물살에 돌들이 깎이고 닳아서 크기가 점점 작아집니다. 또 작은 물방울 하나는 힘이 없지만 오랜 세월 끊임없이 떨어진다면 단단한 바위도 구멍이 나게 되지요.
그런데 욥은 조금씩 흐르는 물도 크고 단단한 돌을 닳게 할 수 있다고 한 후에, 왜 넘치는 물이 작은 티끌을 씻어 버린다고 표현한 것일까요?
여기서 넘치는 물은 ‘하나님의 높으심’을 나타냅니다. 욥은 넘치는 물처럼 엄청난 권세자이신 하나님께서 티끌만도 못한 자신을 짓밟고 쓸어 버렸다고 비꼬는 것입니다. 이렇게 욥은 하나님이 사람의 소망을 끊어 버리시는 분이라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시며, 평안과 소망을 주시는 분입니다(민 6:24-26, 애 3:33, 렘 29:11). 때를 따라 하나님께서 연단을 허락하시는 것도 우리를 힘들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먼저 영혼이 잘됨으로 더 큰 축복을 받도록 하시기 위함임을 알아야 합니다.


3. 과거에 집착하며 모든 것을 하나님 탓으로 돌리는 욥

“주께서 사람을 영영히 이기셔서 떠나게 하시며 그의 얼굴빛을 변하게 하시고 쫓아 보내시오니… 그가 깨닫지 못하나이다”(욥 14:20-21)
욥은 엄청난 권세자인 하나님이 티끌만도 못한 인생인 자기를 끝까지 추격하시며 이기려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재산을 거둬 가셨으며 건강도, 가정의 화평도 떠나게 하셨고, 결국은 욥의 생명까지도 이 세상을 떠나게 하여 음부로 보내려고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욥은 처음에는 하나님께 간청도 해보고, 나중에는 원망, 탄식을 넘어 나쁜 하나님이라 매도하는 등 이런저런 방법을 다 동원해 보았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으로부터 아무런 응답이 없으니 이제는 입술을 제어하지 않고 나오는 대로 마구 쏟아내고 있는 것이지요.

‘그의 얼굴빛을 변하게 한다’는 것은 그동안 욥이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하나님 앞에 원망과 탄식으로 붉으락푸르락하는 등 얼굴빛이 변해온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그 아들이 존귀하나 그가 알지 못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욥이 과거에는 부유하였고 존귀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믿었기에 하나님 앞에 감사의 제사를 지냈지요. 그러나 과거에 아무리 행복했을지라도 하나님이 다 거두어 가 버리셨으니 기억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감사하지도 않고 은혜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또 욥은 “비천하나 그가 깨닫지 못하나이다”라고 말하는데, 이는 자기가 비천한 자리에 있지만 스스로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욥은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비천해진 상황에서도 얼마나 친구들을 무시하였습니까?
“친구들아, 나는 의인이며 너희보다 월등히 지식과 지혜가 많으니 내 앞에서는 말도 꺼내지 말라” 했고, 하나님 앞에도 교만한 말로 따졌지요. 욥은 지금 낮은 자리에 앉아 있으니 자기의 비천함을 깨달아야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는데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는 본래 존귀한 자였는데 하나님이 이 모양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지, 왜 내가 비천하냐”고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현재 위치를 정확하게 깨우치고 문제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6) 말씀한 대로 범사에 진리로 조명하여 자신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만일 물질 문제, 가정 문제, 질병 문제 등 어려움이 있다면 분명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 “왜 이런 질병에 걸렸는가” 그 이유를 발견하여 돌이키는 것이 축복이지요. 그렇지 않고 욥과 같이 축복을 누렸던 과거에 집착하거나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고 매사를 남의 탓으로만 돌린다면 문제 해결도, 아무런 발전도 없는 것입니다.

“오직 자기의 살이 아프고 자기의 마음이 슬플 뿐이니이다”(욥 14:22)
욥이 앞에서는 과거를 돌아보며 말하였는데 이제는 현실로 돌아가 자신을 보고 있습니다. 현실은 내 살이 썩어가고 있으며 고통스럽고 마음이 곤고하며 슬프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당한 지금의 괴로움도 하나님 때문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욥은 이 모든 것을 자신의 탓이 아닌 하나님의 탓으로 돌리고 있기에 깨닫지도 못하고 회개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준행해 나간다면 어떤 비바람도, 범람하는 물도 나를 어찌할 수 없습니다(마 7:24-25). 그러므로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하나님 탓, 다른 사람 탓, 환경 탓으로 돌릴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이 말씀 안에 굳건히 서 있었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4. 변론의 무익함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가로되 지혜로운 자가 어찌 헛된 지식으로 대답하겠느냐… 유조치 아니한 이야기, 무익한 말로 변론하겠느냐”(욥 15:1-3)
욥의 친구들은 전에는 욥이 지혜로운 줄로 알았었는데, 지금은 가만히 욥의 말을 들어 보니 미련한 사람이었습니다. 욥이 하나님을 나쁜 하나님으로 몰아가며 쉼 없이 원망 탄식의 말, 광풍 같은 말을 쏟아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욥 네가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헛된 지식으로 대답할 리가 없다”라고 말합니다. 아예 욥을 무시하며 미련한 자라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변론이 이처럼 무익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달아야 합니다. 만일 욥이 친구들과 변론하지 않았다면 친구들이 이렇게 얕잡아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잠언 9:10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 말씀합니다. 만일 욥이 하나님을 끝까지 경외했다면 친구들로부터 미련한 자라는 말을 듣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변론 중에 나오는 말들이 하나님을 경외함에서 떠난 말들이요, 진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결국 미련한 자가 되고 만 것입니다.
이어서 엘리바스는 “어찌 동풍으로 그 품에 채우겠느냐”라고 했는데, 이는 동쪽에서 부는 바람을 사람의 품에 안을 수 없다는 말이지요. 바로 욥의 말이 무익하고 헛됨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여기서 유조치 아니한 이야기란, 도움이 되지 않는 쓸데없는 말을 뜻합니다. “욥아, 너는 바람을 잡으려는 것처럼 헛되고 무익한 변론을 하고 있으니 참으로 미련한 자의 말이 아니냐” 이렇게 질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바스의 이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책망하는 자세가 옳은 것도 아닙니다. 엘리바스가 아무리 욥을 책망할지라도 지금은 소용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욥은 친구들 때문에 점점 감정의 골이 깊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감정이 일어나 마음이 뒤틀린 상태에서는 아무리 옳은 말도 마음으로 받지 못합니다. 오히려 이 말로 인해 더 화가 나고 감정이 폭발할 수 있지요.
따라서 친구들이 욥의 연단을 길게 만드는 장본인이라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만일 친구들이 옆에 없었다면 욥은 변론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조용히 묵상하며 회개거리를 찾았다면 이렇게 연단이 길어지지도 않았겠지요.
욥의 친구들처럼 우리가 어떠한 말을 하느냐에 따라서 상대에게 슬픔과 고통을 주며 원수를 맺게 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잠 10:19). 아무리 좋은 소식이며 옳은 말이라 해도 변론은 아무런 유익을 가져다주지 못하기 때문에, 상대가 받지 못할 때는 말을 멈춰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나 성도를 심방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리를 받는 사람에게는 주되, 오히려 그 말씀으로 시시비비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사람에게는 주지 말아야 합니다(마 7:6). 이는 진리를 받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아예 전도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하여 성령의 음성을 듣고 선한 지혜를 받아서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현재 어려움을 만났다 해도 과거에 내게 주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합니다. 내가 문제를 만나고 힘든 일이 생겼다 해도 하나님은 살아 계시며 언제나 사랑으로 나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이렇게 변함없으신 하나님을 믿어 드린다면 어떤 고난과 역경이라도 능히 승리할 수 있습니다.
모든 성도님들도 문제 앞에 낙심하고 믿음을 잃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어려움으로 인해 믿음이 성장하며 더 큰 축복을 받아가는 복된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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