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저녁 예배

제목 욥기 강해 (35)   [욥 15:4-11]
설교자 직무대행 이수진 목사
등록일 2023.02.12
엘리바스의 두 번째 변론을 살펴보면서 우리의 말과 행동이 상대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1. 욥을 판단하며 비난하는 엘리바스

“참으로 네가 하나님 경외하는 일을 폐하여 하나님 앞에 묵도하기를 그치게 하는구나”(욥 15:4)
엘리바스는 “욥아, 예전에 네가 부유할 때는 하나님 앞에 번제를 드리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했었잖아. 그런데 지금은 하나님을 경외하기는커녕 오히려 원망하고 나쁜 하나님으로 만들어 가고 있으며, 기도조차 하지 않는구나.” 이렇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욥이 하나님 앞에 반항하도록 만든 요인 중의 하나가 친구들과의 변론이었기 때문에 친구들에게도 책임이 큽니다. 이는 우리가 누군가를 상담해 줄 때에도 주의해야 할 부분입니다. 내 말 한 마디가 상대에게 믿음과 생명을 심어 줄 수도 있고, 반대로 상대를 실족시키거나 더 악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특히 주의 종이나 일꾼들은 영혼들을 심방할 때에 인간적인 생각을 동원하지 말고 항상 성령의 음성을 들어서 대화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네 죄악이 네 입을 가르치나니 네가 간사한 자의 혀를 택하였구나 너를 정죄한 것은 내가 아니요 네 입이라 네 입술이 너를 쳐서 증거하느니라”(욥 15:5-6)
여기서 “네 죄악이 네 입을 가르친다”는 것은 욥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욥 스스로가 죄인임을 표명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엘리바스는 왜 욥을 간사하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옛날에는 욥이 하나님을 지극히 경외하며 높여 드렸는데 이제는 그 반대가 되었습니다. 욥은 “하나님은 순전한 자나 악한 자나 일반으로 취급하신다”고 말하는가 하면, “악한 자에게는 축복을 주고, 의인은 멸망의 길로 인도하신다”며 나쁜 하나님으로 몰아갔지요.
또 예전에는 덕스러운 말로 사람들을 가르치고 도와주었었는데, 이제는 헛된 말을 쏟아내고 입술이 가벼운 자가 되었으니, 이를 가리켜 간사한 혀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겉으로 드러나는 말과 행동만으로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성결되기 전까지는 마음 따로, 입술 따로일 때가 많고, 말과 행동이 일치되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때 사람들은 상대의 말과 행동을 보고 판단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십니다.
욥은 진리를 알지 못하여 옳지 않는 말들을 쏟아냄으로 인해 간사한 자처럼 보이지만 마음 중심에서 간사한 사람은 아니지요.
엘리바스는 욥에게 “내가 너를 정죄한 것이 아니라 네 입술이 너를 정죄하고 있다.”고 비난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친구들도 욥을 비난할 자격은 없습니다. 그동안 온갖 질타로 욥의 감정을 건드리고 혈기 나게 하는 등, 욥으로 하여금 악을 발하도록 원인을 제공했기 때문입니다.


2. 욥을 비꼬고 무시하는 엘리바스

“네가 제일 처음 난 사람이냐 산들이 있기 전에 네가 출생하였느냐 하나님의 모의를 네가 들었느냐 지혜를 홀로 가졌느냐”(욥 15:7-8)
이 질문들은 모두 욥에 대한 엘리바스의 꼬인 마음의 표출입니다. 엘리바스는 인류 가운데 가장 처음 난 사람은 아담이라는 것도, 사람보다 산이 먼저 창조된 줄도 너무 잘 알고 있었습니다. 또 인간이 하나님의 비밀한 것을 들었을 리가 없다는 것도, 혼자 지혜를 가질 리가 없다는 것도 잘 알면서 욥을 비꼬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욥의 친구들이 왜 이렇게까지 마음이 꼬이고 꼬인 것일까요?
이는 그동안 욥이 친구들을 무시한 말들 때문입니다(욥 13:1-4). 욥은 친구들에게 교만한 태도로 “너희와는 상대도 되지 않으니 하나님과만 변론하겠다” 했습니다. 그런데 친구들 편에서는 막상 욥이 하나님과 변론하는 말을 들어 보니 너무나 타당성이 없는 엉터리 말이었지요.
그렇지 않아도 마음이 꼬인 상태에 있던 친구들은 더욱 꼬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욥의 모습이 혼자 잘난척하는 독불장군처럼 느껴졌기에 엘리바스는 욥을 호되게 질책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하지만 욥의 입장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욥을 위로하러 온 친구들이 자꾸만 “네가 잘못해서 재앙이 온 것이다. 회개해라, 부르짖어 기도해라.” 등등 감정적인 말들로 책망만 하니 욥은 괴로움이 더할 수밖에 없었지요.


3. 변론의 무익함

“너의 아는 것이 무엇이기로 우리가 알지 못하겠느냐 너의 깨달은 것이 무엇이기로 우리에게는 없겠느냐”(욥 15:9)
엘리바스는 “욥아, 네가 알고 있는 것을 우리도 안다. 네가 깨닫는 것을 우리도 다 깨닫고 있다.” 이렇게 맞대응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변론 때문에 얼마나 사단의 훼방을 받고 시험 환난을 자초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는 말은 지극히 작은 것을 알면서 마치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의 어리석음과 교만함을 일깨워 주는 속담입니다. 일부분을 알면서 전체를 아는 것처럼 말하여 변론과 다툼을 일으키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영적인 장님이 되어 내가 아는 것만을 옳다고 주장하다가 판단 정죄가 나오고, 자칫 하나님 앞에 큰 죄의 담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아는 것이 얼마든지 사실과 다를 수 있고, 어느 한 분야일 수도 있음을 알아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겠습니다.
욥과 친구들은 자신들이 아는 지식의 한계 안에서 자기주장을 하고, 서로 무시하며 판단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형제간에도 처음에는 하찮은 일을 가지고 변론이 시작되었는데, 서로 양보를 안 하고 자기주장을 하다 보면 감정이 생기고 혈기가 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마 23:11),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롬 12:14)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면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 있지만, 반대로 말씀을 위배하면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 없습니다.
쌍방에서 서로 오해를 하며 상대의 감정을 돋우고 같이 악을 발하고 있으니 어떻게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상대는 진리를 몰라서 나를 핍박하는데, 나는 진리를 잘 알면서 상대를 저주한다면 더 악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악한 자를 선으로 대할 때 선이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2:17-18에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로마서 12:21에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말씀합니다. 내 편에서 아무리 화평하려고 해도 상대가 받아 주지 않으면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가능하면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능력이 많으신 분이지만 누구와도 변론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 당시, 대제사장들과 제사장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끊임없이 예수님에 대한 위협과 궤계를 꾸몄습니다.
그렇다 하여 악한 자들이 예수님을 만질 수조차 있는 것이 아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섭리가 온전히 성취될 때까지 때로는 숨기도 하시고 피하기도 하시면서 이 땅에서의 사역을 이루셨습니다.
이는 결코 비겁한 것이 아니라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마 5:39) 말씀하신 대로 오직 진리로 행하시며, 누구와도 다투지도 들레지도 않으셨던 것입니다(마 12:19-20).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야 합니다. 내가 명백히 옳다 해도 상대방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차라리 말을 하지 말고 기다리는 편이 낫습니다. 자기 의견만 주장하다가 상대의 감정을 돋우지 말고 진리 안에서 선한 방법을 택하여 서로 화평을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4. 하나님의 말씀으로 조명해야

“우리 중에는 머리가 세기도 하고 연로하기도 하여 네 부친보다 나이 많은 자가 있느니라 하나님의 위로와 네게 온유하게 하시는 말씀을 네가 어찌 작다 하느냐”(욥 15:10-11)
욥의 친구들 중에는 나이가 들어 백발인 사람도 있고, 심지어 욥의 부친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도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엘리바스는 “욥아, 네가 나이 많은 사람 앞에서 그렇게 안하무인격으로 무례하게 행할 수가 있느냐” 말하고 있습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여 너의 위로가 되게 해 주었는데 욥 네가 이렇게 반항함은 어찌된 일인가? 네가 교만하여 우리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책망하고 있지요.
그러나 이는 참으로 우스운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욥과 마찬가지로 친구들도 욥을 무시하고 판단하며 같은 죄를 짓고 있기 때문입니다. 친구들의 감정 섞인 말이 욥으로 하여금 점점 악을 발하게 만들었으니, 사실은 욥보다 그들의 잘못이 더 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상대를 지적하거나 자신의 말이 옳다 주장하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감정이 격해져 있는 사람에게 “성경에는 혈기 내지 말라 했는데.” 한다면 어찌 상대가 기쁨으로 받겠습니까?

사람은 상대의 생각이나 속마음까지 환히 알지 못합니다. 다만 말이나 행동, 표정 등 겉으로 나타나는 모습으로 상대의 마음을 짐작할 뿐이지요. 마찬가지로 자신의 마음 역시 정확히 모를 때가 많으므로 이를 조명해 주는 도구가 필요합니다. 바로 진리인 하나님 말씀이지요.
그러면 욥과 친구들의 변론을 보면서 우리는 어떤 말씀으로 조명할 수 있을까요?
히브리서 12:14에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말씀합니다. 또 야고보서 1:19-20에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말씀했지요.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말씀을 지식으로만 담고 있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 말씀을 명심하여 마음에 일군 사람은 일상생활 속에서도 진리가 아니면 듣지 않으려 할 것이고, 또 말 한 마디를 하더라도 심사숙고할 것입니다. 변론하다 보면 성이 나고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며, 서로 간에 화평이 깨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살아 운동력 있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의 삶 가운데 항상 등과 빛으로 삼아, 매일매일 변화와 생명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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