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저녁 예배

제목 욥기 강해 (39)   [욥 16:1-6]
설교자 직무대행 이수진 목사
등록일 2023.03.12
오늘은 허망한 말의 무익함과, 영적인 사람과 육적인 사람의 차이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1. 허망한 말

“욥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런 말은 내가 많이 들었나니… 허망한 말이 어찌 끝이 있으랴 네가 무엇에 격동되어 이같이 대답하는고”(욥 16:1-3)
15장에서는 엘리바스가 말했고, 16장부터는 욥이 그 말을 받아서 다시 변론을 시작합니다. 지금까지 욥의 친구들이 욥에게 권면했던 말들은 욥도 이미 선진들로부터 들어와서 잘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욥은 왜 친구들을 번뇌케 하는 안위자라고 표현한 것일까요?
안위란 “몸을 편안하게 하고 마음을 위로해 주는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욥에게 안위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욥을 혈기 나게 하고 속상하게 하며 번뇌케 만들 뿐이었지요. 친구들은 계속 말로 욥을 다그쳤기에 욥이 그 말을 들으면서 자신에 대해 생각하게 되니 머리가 더욱 복잡해졌던 것입니다. 그러니 친구들의 말로 인해 오히려 시달리고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믿음의 형제들 간에도 주의해야 할 부분입니다. 상대가 내 말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내 말이 상대로 하여금 오해와 번뇌를 하게 만든다면 차라리 잠잠히 기다리는 편이 낫지요.

“허망하다”라는 말은 “거짓되고 망령되다, 허무하고 어이없다” 또는 “허황되고 미덥지 아니하다”라는 뜻입니다. 욥은 왜 친구들의 권면을 허망한 말이라고 단정하는 것일까요? 이는 친구들의 행함이 본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주 안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예를 들면, 진리 안에 살면서 본이 되는 사람이 전도를 하면 사람들이 쉽게 마음 문을 열고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또 축복을 받고 있는 사람이라야 “하나님을 믿으면 축복을 받습니다.”라고 담대히 전할 수 있고, 이 말을 듣는 사람도 “당신을 보니 나도 교회에 가고 싶습니다.”라고 답을 하게 되지요.
반대로 언어와 행실이 바르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사람이 전도를 한다면 “당신이나 좀 잘 믿으세요.”라고 비웃음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하는 헛된 말이 바로 허망한 말인 것입니다.

욥은 친구의 말이 허망하다고 하면서, “네가 무엇 때문에 격동되어 이런 말을 하는가?”질문을 던집니다. 욥의 친구들이 무엇 때문에 이처럼 격동된 것일까요?
먼저는 욥이 하나님 앞에 합당치 못한 말들을 했고, 이에 친구들이 열심히 권면했는데, 욥은 이를 무시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나쁜 하나님으로 매도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의롭다고 주장하니 친구들은 이러한 욥이 아니꼽고 싫기 때문에 점점 감정이 격해지면서 흥분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욥은 본인이 이처럼 원인 제공을 했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친구들에게 “왜 그처럼 감정이 나서 허망한 말들을 하느냐?”고 묻습니다. 게다가 욥 자신은 여전히 옳으며 온전하다고 믿고 있었으므로 친구들이 격동하는 것이 이해가 안 되었지요.
이렇게 대화 중에 상대가 격동한다면, 양쪽 모두에게 문제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원수도 사랑하라”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 하셨고,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항상 선을 좇으라” 말씀하셨습니다. 또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라” 말씀하셨지요. 이러한 말씀이 내 마음에 영으로 일구어졌다면 무슨 험담을 듣거나 오해를 받는다 해도 진리로 마음을 지킬 수 있습니다.
혹여 내게 잘못이 있어서 비방의 말을 듣게 되었다면 회개하고 돌이키면 되고, 애매히 그런 말을 들었다면 내가 진리를 어기지 않았으니 더더욱 평안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진리대로 하나님 앞에 기뻐하고 감사한다면 원수 마귀 사단이 물러갈 수밖에 없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므로 축복이 임하게 되지요.
반대로 그러한 말로 인해 내 마음이 요동하고 감정이 뒤틀린다거나 실족한다면, 이는 내 안에 악이 있기 때문에 사단의 역사를 받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2. 서로 입장을 바꿔 보자고 제안하는 욥

“나도 너희처럼 말할 수 있나니 가령 너희 마음이 내 마음 자리에 있다 하자 … 너희를 강하게 하며 입술의 위로로 너희의 근심을 풀었으리라”(욥 16:4-5)
여기서 말을 짓는다는 것은 정작 행함은 없으면서 자기들의 생각 속에 소신껏 말을 지어낸다는 것입니다. 즉, 친구들이 욥의 편에서 생각하고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생각 속에서 마음대로 욥을 질책했다는 의미입니다.
욥은 친구들의 말이 자기와는 거리가 먼 얘기라고 생각하므로, 서로 입장을 바꿔 보자고 제안합니다.
“만일 너희가 내 처지에 있고 너희의 악한 마음이 나에게 있다면 나도 그럴 듯한 말로 너희를 치며, 너희가 격동될 수 있는 말로 너희들에게 퍼부었을 것이며 너희들에게 머리를 흔들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욥은 오히려 그들에게 여러 가지 격려의 말로 힘과 위로를 주며, 근심을 덜어 주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예전에 욥에게 이러한 선의 행함이 있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입니다(욥 4:3-4). 욥이 연단받기 전에는 비록 영적인 행함은 아니었다 해도 육적으로는 선과 사랑을 베푸는 행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아, 너희들은 행치도 않으면서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이것저것이 잘못되었다 지적하고 있지만, 나는 행했기 때문에 너희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내가 시험을 받기 전이라면 너희를 강하게 할 수 있고 너희의 근심을 풀어 줄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지요.
욥의 편에서는 옳은 말을 하는 것 같지만, 이는 친구들을 더욱 격분하게 만들 뿐이었습니다. 친구들은 얼마나 격동이 심했는지 온몸을 떨고 머리를 흔들 정도였습니다. 친구들이 볼 때 현재의 욥은 그러한 말을 할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친구들의 눈에는 욥이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엉망진창이 되었는데, 회개하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께 변론하며 친구들을 업신여기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니 욥이 아무리 좋은 말을 한다고 해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지요.

욥은 자기가 옛날 같았으면 친구들을 강하게 할 수 있으며 근심을 풀어 줄 수 있었다고 하였는데, 이는 앞뒤가 안 맞는 말입니다. 자기 근심을 풀 수 없는 사람이 어떻게 타인의 근심을 해결해 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이러한 대화법이 얼마나 무익한지 알아야 합니다. 만일 욥과 같이 현재는 초라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 “나도 과거에 이런 사람이었다.”고 하면서 상대에게 권면이나 훈계를 한다면 오히려 비웃음거리가 되기 쉽습니다.
예를 들어, 술 담배를 하며 나쁜 언행으로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사람이 “나는 모태 신앙이고, 예전에는 성가대도 하고 주교사도 하면서 열심히 충성했다.”라고 말한다면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모습입니까.
이와 반대로, “내가 예전에 신앙생활을 잘할 때는 부유했었는데 신앙생활을 게을리 하고 세상에 빠지다 보니 결국 재산을 탕진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내 전철을 밟지 말고 신앙생활을 잘하시기 바랍니다.”라고 간증한다면, 이는 회개하는 자세이지요.
이렇게 과거에 자신이 실패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면서 권면하면 상대에게도 은혜가 되고, 교훈과 유익을 줄 수 있습니다.


3. 육적인 사람과 영적인 사람의 차이

“내가 말하여도 내 근심이 풀리지 아니하나니 잠잠한들 어찌 평안하랴”(욥 16:6)
흔히 남의 일은 쉬워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어떤 일로 고민하고 있으면 “아무것도 아닌 걸 가지고 뭘 그리 어렵게 생각하십니까. 이렇게 하시면 척척 해결됩니다!”라고 큰소리치는 것도 볼 수 있지요. 그런데 정작 본인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 말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그런 사람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영적으로도 내가 하나님을 만난 체험이 없다면 상대에게 확신 있게 말할 수 없고, 내가 이루지 못한 것을 상대에게 이루라고 담대하게 말할 수는 없지요.
욥도 예전에는 남을 강하게 해주고 근심을 풀어 주었으나, 지금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깨우치면서 자기 발견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욥이 존경받을 만한 위치에 있을 때는 그의 말이 사람들에게 먹혀들어가는 듯했지만, 지금은 친구들조차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욥 자체가 영이 아닌 육의 사람이므로, 막상 어려움을 당하니 입으로 악한 말을 쏟아냈고, 이로 인해 친구들은 욥을 아주 천한 사람으로 취급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육이란 변하고 썩어질 것이며 무익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참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연단을 허락하실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요 6:63)는 말씀처럼. 상대에게 변화와 생명을 줄 수 있으려면 먼저 내 마음이 진리로 채워져서 말에 영적인 권세가 따라야 합니다.

육적인 사람은 어려움이 있을 때 잠잠히 견디지 못합니다. 감정이 꿈틀대고 잠도 오지 않으니, 결국은 상대를 찾아가 폭발해야 시원함을 느끼지요.
그러나 영적인 사람은 사도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백한 대로, 자기가 없으니 감정을 쌓아 둘 일도 없고, 오히려 상대에게 져줄 때 시원함을 느낍니다. 어려움이 왔을 때도 묵묵히 참고 견디며 기다릴 수 있습니다.
또한 육적인 사람은 남의 허물에 대해서 들으면 잠잠하지 못하고 얼른 주변에 전해야 마음이 시원합니다. 육의 사람은 원수 마귀 사단의 음성을 들어 나가기에 악을 발함으로 사단을 시원하게 하니 내 마음도 시원해지는 것입니다.
만일 영적인 사람이 혹여 남의 허물을 전한 일이 있었다면 마음이 시원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탄식 소리에 심히 곤고함을 느끼게 됩니다. 힘든 일을 만났을 때 주변에 하소연을 하면 속이 편안한 것이 아니라 곤고해지지요. 기뻐하지 못하고 불평한 것을 회개해야 편안해집니다.
육적인 사람과 영적인 사람은 이렇게 정반대입니다. 그러니 영적인 사람이 되어 갈수록 성령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게 되며, 참된 평안과 기쁨을 누리게 되지요.

욥은 영적인 사람이 아니었기에 잠잠하면 고통스러웠으며 악을 입 밖으로 쏟아내야 했습니다. 그래도 마음에 선이 있기 때문에, 자신이 뿌린 말들로 인해 갈수록 곤고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람이 입술로 부정적인 말을 심어 나가면 스스로 올무에 매이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잠언 13:2에 “사람은 입의 열매로 인하여 복록을 누리거니와” 말씀했고, 잠언 18:21에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말씀을 명심하여 부정적인 말을 멈추고 진리 안에서 자꾸 긍정해 나가면, 상황을 유리하게 바꾸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범사에 입술을 제어하여 오직 긍정의 고백, 믿음의 고백, 선의 고백을 하는 지혜로운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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