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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십자가의 도(10)
설교자 당회장 이재록 목사 설교본문 눅2:1-7 날짜 2005.05.22
오늘은 모든 인류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십자가의 도 중에서 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구유에 누이시고 가난을 겪으셨는가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증거하고자 합니다.

1. 예수님께서 태어나 짐승의 구유에 누이신 이유

본문을 보면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잉태한 동정녀 마리아는 남편인 요셉과 함께 베들레헴에 갔습니다. 그런데 사관이 모두 차서 묵을 방에 없었기에 마리아는 한 사관의 짐승 우리에서 해산을 하게 되었고 강보에 쌓인 예수님을 마땅히 누일 곳이 없으니 짐승의 먹이를 담는 구유에 눕혔습니다. 이처럼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께서 짐승의 우리에서 태어나시고 짐승의 구유에 누이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 때문입니다.

전도서 3:18을 보면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인생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저희를 시험하시리니 저희로 자기가 짐승보다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하심이라 하였노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시험해 보시니 짐승과 다름이 없더라는 사실입니다. 혹자는 ‘왜 사람이 짐승과 같다는 것인가?’ 하며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람의 악함을 생각해 보면 짐승보다 못한 경우도 많습니다.

사자나 표범같은 맹수들도 배가 고프거나 자신이 위험하다고 느낄 때가 아니면 불필요한 살상은 잘 하지 않습니다. 또 짐승들 중에도 한번 짝을 맺으면 평생토록 상대를 배신하지 않는 짐승들이 있고 새끼를 위해서 많은 희생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만물의 영장이라 하는 사람들은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여자와 어린아이를 가리지 않고 수많은 사람들을 죽입니다. 가족이나 이웃 간에도 참사랑을 찾아보기 어렵지요. 이혼율은 날이 갈수록 증가하며 물질의 욕심 때문에 부모 자식 간에, 형제 간에도 서로 싸우고 고소하며 심지어는 죽이기도 합니다.

원래 하나님께서는 선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의 범죄 이후 죄인이 된 사람들은 영이 죽게 되니 하나님의 선하신 형상을 잃어버리고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차츰 마음이 죄악으로 물들어가니 세상 정욕에 따라, 자기 욕심에 따라 온갖 죄를 지으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거룩한 천국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사람의 본분을 되찾아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구유에 누이신 것은 바로 이처럼 짐승과 다름없는 인류를 대속하여 구원받게 하시기 위함이지요.

요한복음 6:51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셨습니다.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을 먹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양식삼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의 몸이 양식을 먹어야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 사람의 영도 영의 양식을 먹어야 살 수 있지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짐승과 같은 인류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어 주셨지요. 예수님을 통해 사람이 자신의 본분을 되찾고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을 알려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짐승의 먹이 그릇인 구유에 눕혀지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짐승같은 삶에서 벗어나 참생명을 얻을 수 있을까요? 전도서 12:13에 보면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시기하지 말라, 미워하지 말라, 안식일을 지키라,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등 많은 명령들이 기록되어 있지요. 이처럼 성경에 “하라” 하신 것은 하고 “하지 말라” 하신 것은 하지 않으며 “지키라” 하면 지키고 “버리라” 하면 버리는 것이 곧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경 말씀대로 행하라고 하면 “그 명령들을 어떻게 다 지키란 말인가, 신앙생활하기가 너무 힘들다” 말하는데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힘들게 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부모들이 자녀를 사랑하여 “열심히 공부해라, 깨끗하게 씻어라” 하며 사람의 도리를 가르치듯이 하나님께서도 사람의 본분을 다하도록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하지 말라” 명하시는 것들은 시험 환난을 당하지 않고 지옥에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요, “행하라”는 것은 축복받고 응답받으며 천국에 갈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밝히 깨달아 마음 중심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명령을 지켜 행함으로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되찾고 영생복락을 누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2. 우리의 가난을 대속하시고자 가난한 길을 가신 예수님

하늘의 모든 영광을 버리고 척박한 이 땅에 오셔서 초라한 짐승의 우리에서 태어나신 예수님께서는 일평생 가난한 삶을 사셨습니다. 마태복음 8:20에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말씀하신 대로 복음을 선포하고 병자들을 치료하시기 위해 일정한 거처도 없이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기도 했고 떡 다섯 개와 두 마리의 물고기로 오천 명 이상을 먹이고도 남은 것이 열두 바구니에 채워지는 기적을 베푸시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굳이 가난한 삶을 사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고린도후서 8:9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말씀하신 하신 대로 우리에게 부요의 축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처음부터 사람에게 가난의 고통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에덴동산에 살 때는 모든 것이 풍성했고 땅이 풍성한 과실을 내므로 그냥 따먹기만 하면 되었지요. 그런데 아담이 범죄한 후로는 사람과 함께 만물도 저주를 받게 되었고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므로 땀 흘려 경작을 해야 식물을 얻을 수 있게 되었지요. 이처럼 모든 사람이 가난을 겪는 것은 첫사람 아담의 범죄로 인한 저주 때문이기에 예수님께서 가난을 대속해 주시고자 친히 가난한 길을 가신 것입니다.

혹자는 하나님께 물질의 축복을 구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지만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요케 하신다는 수많은 축복의 말씀이 있습니다. 또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비롯하여, 이삭이나 야곱, 요셉, 다니엘 등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 말씀에 순종했던 사람들은 풍성하고 부요한 삶을 누렸던 것을 볼 수 있지요. 우리도 가난을 대속하신 주님의 은혜 속에서 부요함의 축복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물질의 욕심을 가지고 구하는 것이 아니라 구제하고 선교하며 성전을 건축하는 등 선한 일에 사용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구해야 하지요.

마태복음 7:7-11에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께서도 자녀들이 믿음으로 구하는 것마다 주기를 원하시지요.

그런데 무조건 “아버지, 축복주세요” 기도한다고 해서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요한삼서 1:2을 보면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하여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기 위해서는 영혼이 잘되어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영혼이 잘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감으로 잃었던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는 것을 뜻하지요. 신명기 28:2에도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미치리니”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이라 해도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믿음으로 씨를 심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6:7에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말씀하신 대로 심지 않고 거두고자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법칙을 어기려는 것이고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9:6에도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했습니다. 아무리 믿음이 큰 사람이라 해도, 많이 심었을 때라야 많이 거두며 조금밖에 심지 않았다면 적게 거둘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은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곧 갑절 이상을 주시고 영혼이 잘된 만큼, 삼십 배, 육십 배, 혹은 백 배로 갚아 주시지요. 그런데 동시에 심었다 해도 즉시 거두게 하실 때보다 오래 기다렸다가 거두게 하실 때는 더욱 큰 축복으로 돌아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콩나물 같은 것은 금방 자라나지만 비싼 과실이나 인삼 같은 것은 수확을 하기까지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지요.

어떤 사람은 가난하여 하나님 앞에 심고 싶어도 심을 것이 없으므로 안타까워하는 경우를 봅니다. 그러나 많이 심는 자가 많이 거둔다는 말은 단지 그 액수나 분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은 물질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중심의 향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이 어떤 중심으로 심었는지, 얼마나 사랑과 믿음으로 심었는지를 다 아십니다.

마가복음 12장에는 두 렙돈을 드린 과부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연보궤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헌금하는 것을 보고 계시다가, 겨우 두 렙돈을 드린 가난한 과부를 보고 구차한 중에 자신의 소유를 다 드린 그가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도 많이 드렸다고 칭찬을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이 중심의 향이라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어느 누구도 “나는 가난해서 심을 것이 없다”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물론, 물질로 심었다 해서 물질로만 갚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당장 물질로 주시지 않아도 영혼이 잘되게 하시는 축복이 참된 축복이지요. 이방인이면서도 하나님을 경외하여 구제를 많이 했던 고넬료는 온 가족이 구원받는 은총을 받았으며, 열심히 선행과 구제를 쌓았던 도르가라는 여인은 죽었다가도 기도받고 다시 살아나는 체험을 하기도 했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짐승의 우리에서 태어나 짐승의 구유에 누이신 것은 짐승과 같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어 주시기 위함이라 했습니다. 또한 천지 만물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가난하게 사신 것은 사람들의 가난을 대속하고 부요하게 하시기 위함이지요.

그러므로 부요케 하시며 축복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를 깨달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사람의 본분을 행하며 영육간에 마음껏 축복을 받아 하나님께 영광돌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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