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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창세기 강해(108)
설교자 당회장 이재록 목사 설교본문 창 7:4-9 날짜 2014.05.09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창세기 강해 일백여덟 번째 시간입니다.
본문 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지금부터 칠 일이면 내가 사십 주야를 땅에 비를 내려 나의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버리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홍수 심판이 앞으로 ‘칠 일 후에’ 일어난다는 뜻이지요. 역으로 심판의 순간까지 아직 ‘칠 일’이 남아 있다는 의미도 됩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홍수 심판이 있기 전에 이미 여러 차례 회개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죄악에서 돌이키지 않으므로 결국 홍수 심판에 이르고 말았지요. ‘심판’을 취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그럼에도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곧바로 세상을 심판하신 것이 아니라 다시 한 번 ‘칠 일’이라는 시간을 주셨습니다. 완전수인 7만큼의 날을 더 주신 것입니다.

여기에 바로 아버지 하나님의 정확한 공의가 담겨 있습니다. 이것이 왜 하나님의 공의일까요? 하나님께서 주신 7일은 누군가 돌이켜 구원의 방주에 탈 마음이 있다면 그에게 주어지는 마지막 유예 기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시간을 주셨음에도 이 기회를 붙잡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하나님을 원망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7일’이란 시간은 하나님 편에서 홍수 심판을 이루시기까지 공의의 법칙에 어긋나지 않도록 얼마나 많은 것들을 따져 보셨고 얼마나 하나하나를 점검해 보셨는지, 얼마나 섬세하게 두루 살피셨으며 얼마나 철저히 점검하셨는지를 나타냅니다.

한편, 5절에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는 말씀은 노아 편에서도 홍수 심판을 위한 대비가 전혀 부족됨 없이 어떤 실수도 없이 이뤄졌다는 것을 나타내지요.

성도 여러분, 겔 18:23에 보면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어찌 악인의 죽는 것을 조금인들 기뻐하랴 그가 돌이켜 그 길에서 떠나서 사는 것을 어찌 기뻐하지 아니하겠느냐”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죄악이 쌓이고 쌓여서 심판할 수밖에 없으실 때에도 그중에 한 사람이라도 구원할 자가 있나 살피셨고, 최후의 순간까지 회개의 기회를 주셨지요.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 때에도 친히 천사장들을 보내시어 그 성읍을 살피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롯과 그의 가족들은 구원받도록 급박한 상황에서도 심판을 늦추셨지요.

니느웨 성을 심판하려 하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이지요. 앗수르는 이스라엘의 적대국입니다. 그들의 악독이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공의로는 멸망시켜야 하는 상황이었지요.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니느웨 백성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한 번 더 주셨습니다.

요나 선지자를 보내어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고 외치게 하셨지요. 이는 심판의 선포와 함께 ‘40일’이라는 유예 기간을 주신 것입니다. 니느웨 백성들이 죄악에서 돌이킬 시간, 멸망당하지 않고 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나는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했습니다. 죄악에서 돌이킬 시간이 없었습니다.”라고 아무도 하나님을 원망할 수 없지요.

다행히 니느웨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마지막 기회를 붙잡았습니다. 왕을 비롯하여 모든 신하와 백성들이 금식하며 회개했습니다. 심지어 가축들까지도 금식을 시켰지요. 이에 하나님께서는 뜻을 돌이키시어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이처럼 우리 하나님께서는 온전한 공의와 사랑 가운데 심판을 내리기도 하시고 내리시려 했던 심판을 거두기도 하십니다. 노아의 때 홍수 심판 전에 주신 7일이라는 유예 기간은 하나님의 공의를 온전케 하시는 사랑의 표현이었지요. 그 기간 동안 단 한 사람이라도 구원의 방주로 나오면 구원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긍휼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때 중요한 사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홍수가 있기 7일 전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의 가족들, 선택받은 짐승들 모두를 방주 안에 들어가 있게 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문을 닫게 하셨지요. 따라서 그 7일 동안 노아는 더 이상 세상을 향해 “이제 곧 홍수 심판이 시작된다.”고 외칠 수 없었지요.

왜 하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에게 7일이라는 유예 기간은 주시면서 더 이상 심판을 경고하지 않게 하셨을까요? 왜 노아로 하여금 마지막 순간까지 방주의 문을 열어 놓게 하신 것이 아니라 문을 닫게 하신 것일까요? 노아 시대 홍수 심판은 인간경작의 섭리가 함축적으로 담겨 있는 축소판과 같다는 사실입니다.

눅 17:26-27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하셨지요. 노아는 홍수 심판이 있을 것을 안 때로부터 사람들에게 열심히 전파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노아의 말을 듣지 않았고 오히려 노아를 비난했지요.

‘인자의 때’ 곧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때에도 이와 같은 현상이 드러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의 종들과 일꾼들을 통해 때가 임박함을 부지런히 알려 주십니다. 이런 외침을 듣고 주님을 영접하며, 죄를 회개하는 이들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세상에 취하여 복음을 들으려 하지 않으며 오히려 적대시하지요. 적그리스도의 세력이 마지막 때가 될수록 강성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국 때가 되면 주님께서 공중에 강림하시고 믿는 사람들은 휴거되어 7년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요. 반면 이 땅에는 7년 대환난이 시작됩니다. 그때 이 땅에 남겨진 사람은 아예 주님을 믿지 않은 경우나, 믿는다고 했으나 구원받을 만한 믿음을 전혀 갖지 못한 경우이지요.

그런데 이런 이들 중에서도 휴거 사건을 보고 정신을 차리는 이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제서야 성경이 참임을 깨닫고 천국과 지옥이 있음을 깨닫는 것이지요. 이런 이들이 구원받아 천국에 가려면 어떤 고문과 위협을 받는다 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지켜야 합니다. 성령도 이미 거두어졌기에 순전히 자신의 의지로 신앙을 지켜야 하지요.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이렇게라도 구원받을 이들이 있음을 아시기에 7년 환난이라는 기간을 허락하십니다. 공의로는 구원받을 수 없는 이들에게 마지막 기회를 한 번 더 주시는 것입니다.

홍수 심판 전 7일의 유예 기간이 바로 ‘7년 환난’의 의미와 같습니다. 홍수 심판 7일 전 노아와 그의 가족들이 방주 안으로 들어간 것은 구원받은 자녀들이 7년 혼인 잔치에 들어간 것과 같지요.

또한 7년 환난 기간의 이삭줍기 구원이 있듯이 방주의 문이 닫혔다 해도 홍수가 시작되기 전에 누구라도 문을 두드린다면 다시 열어 줄 수 있습니다. 딤전 2:4 말씀처럼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홍수 심판 전 7일의 유예 기간 동안에는 심판을 경고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이미 방주 안에 들어갔기 때문이지요. 이 또한 7년 환난 때에 성령이 거두어져 자신의 의지로만 신앙을 지켜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방주의 문이 닫힌 후에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스스로 깨달아 돌이킨 자라야 구원의 기회를 잡을 수 있었지요. 결국 그 수많은 사람 중에 누구 하나도 회개하고 돌이켜 방주에 들어온 사람은 없었습니다.

7년 환난 때도 이와 비슷합니다. 처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지만 믿는 자들에게 엄청난 핍박이 가해지면 대부분이 배교를 하지요. 끝까지 신앙을 지켜 구원에 이르는 사람은 극히 적게 됩니다. 이처럼 노아 시대 홍수 심판은 인간 경작 마지막의 때와 유사한 점이 많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본문 6-7절을 보시겠습니다. “홍수가 땅에 있을 때에 노아가 육백 세라 노아가 아들들과 아내와 자부들과 함께 홍수를 피하여 방주에 들어갔고” 했지요. “노아의 아들들과 아내와 자부들”은 노아가 방주를 만들고 아버지 뜻과 섭리를 전했을 때 그 말을 믿고 따라 주었던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노아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대로 따른 결과 ‘구원’이라는 놀라운 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노아의 가족들은 당장 눈에 보이는 뚜렷한 홍수의 조짐이 없는 상황에서도 노아의 말을 믿었고 순종했습니다. 참 믿음이란 이처럼 눈에 보이는 것이 없어도 믿는 것입니다.

또한 참 믿음에는 순종의 행함이 따르지요. 노아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오랜 기간 방주를 지어 왔던 믿음입니다. 이에 대해 히 11:7에서는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했지요.

노아의 가족들이 노아의 말을 듣고 노아와 함께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가 믿음에서 나온 행함이었습니다. 결국 이 ‘믿음’이 노아와 그의 가족들을 구원에 이르게 한 것입니다.

만일 노아의 가족들 외에 다른 사람이 노아가 전한 말을 듣고 믿으므로 방주 안에 들어오려 했다면 하나님께서 “너는 안 돼” 하고 막으셨을까요? 그러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특별히 누구만 구원받는다.’고 정해 놓지 않으셨지요. 노아는 열심히 전했으되 사람들이 세상을 사랑하므로 노아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고, 듣고서도 무시해 버렸습니다. 이처럼 믿지 않은 결과 멸망의 심판을 받은 것이고요.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이들이 복음을 전하지만 순수하게 믿고 따르는 사람은 적습니다. 또한 교회에는 나오지만 마음은 여전히 세상에 가 있는 사람도 많지요. 이처럼 입술로는 “믿습니다.” 고백하지만 여전히 세상을 사랑하여 취하는 사람은 사실 방주에 타지 않는 사람과 같습니다.

왜 그런지 비유를 들어보겠습니다. 만일 발 한쪽만 방주 안에 들여 놓고 다른 한 발은 바깥 세상에 내 놓은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이 상태에서 홍수 심판이 임했다면 이 사람이 그 엄청난 폭우와 풍랑 속에서도 계속 방주를 붙잡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얼마 가지 않아 방주에서 떨어져서 세찬 물속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과 신앙에 양다리를 걸치는 사람은 진정 믿음이 있다 할 수 없습니다.

진정 구원받을 만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방주 안으로 완전히 들어와서 곧 말씀 안으로 완전히 들어와서 세상과 나를 단절시키는 행함을 보이지요. 그런데 아직도 ‘내가 과연 구원받을 믿음을 가졌는가’ 확신이 안 서는 분이 계신가요?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세상에 내디딘 발을 거두어 온전히 진리 안으로 들어오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안전한 구원의 방주를 타시고 영원한 나라에 넉넉히 들어가실 수 있는 복된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본문 8-9절을 보시면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과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노아에게 명하신 대로 암수 둘씩 노아에게 나아와 방주로 들어갔더니” 했습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대로 모든 동물들은 기본적으로 암수 둘씩이고, 정결한 짐승은 기본적으로 암수 일곱 쌍이 종족 보존을 위해 방주에 탔지요. 여기에 특별한 용도를 위해 부정한 짐승은 한 쌍 씩을 더 태웠고, 정결한 짐승은 일곱 마리를 더 태웠습니다.

이렇게 방주에 탄 동물들은 홍수 기간 동안 어떻게 지냈을까요? 대홍수 심판이 시작되면서 하나님의 근본의 빛이 이 땅에서 거두어졌고 짐승들은 근본의 속성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수많은 종류의 짐승들이 방주 안에서 1년 넘게 어떻게 함께 지낼 수 있었을까요? 다음시간에 이어서 증거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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