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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창세기 강해(107)
설교자 당회장 이재록 목사 설교본문 창 7:1-3 날짜 2014.05.02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창세기 강해 일백일곱 번째 시간입니다.
최근 여객선 세월호가 침몰함으로 인해 수백 명의 사망, 실종자가 나오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사고의 원인은 먼저 선체의 안정성에 구조적인 문제가 있었다고 하지요. 또한 사고 지역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물살이 빠른 곳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경험이 부족한 3등 항해사가 당시 운항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소식을 접하면서 노아의 방주를 떠올려 보았습니다. 노아의 방주는 폭우가 내리치며, 거센 풍랑 이는 바다에서도 안전했지요. 이는 노아의 방주가 하나님께서 친히 알려 주신 설계 비율대로 건조됐기 때문입니다. 노아의 방주의 규모는 창 6:15 말씀대로 길이 약 150미터, 너비 약 25미터, 높이가 약 15미터이지요. 선박의 길이(150미터)는 너비의 여섯 배이며, 높이의 10배입니다. (너비 X 6) = 길이 = (높이 x 10) 이 비율은 근대의 선박공학자들이 알아낸 대형선박 안전 표준 설계 비율과 정확하게 일치했습니다.

또한 1992년, 우리나라 해사 기술 연구소는 한국 창조과학회의 의뢰를 받아 노아의 방주를 조선 공학적 입장으로 접근하여 실험하고 그 연구 결과를 발표하였지요. 그 결과 노아의 방주가 대홍수 속에서도 건재할 수 있을 만큼 튼튼했음이 과학적으로 증명이 됐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설계하신 노아의 방주는 참으로 안전하여 30미터 높이의 파도도 거뜬히 이겨낼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지난 창세기 강해 102번에서 자세히 설명해 드렸지요. ‘방주’는 영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 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영적인 방주인 하나님의 말씀 안에만 거한다면 어떤 시련이 몰려와도 안전할 수 있음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창세기 7장부터는 대홍수 심판이 시작됩니다.
본문 1절에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비를 내리시기 전 노아에게 가족들과 함께 방주로 들어가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노아와 그의 가족을 대홍수 심판에서 구원하시는 이유를 분명히 밝히셨지요. 바로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당시 오직 노아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이라 인정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자기 보기에 의로운 사람이 아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의로운 사람은 노아처럼 놀라운 축복을 받습니다.

노아는 자기 자신이 구원받음은 물론이요, 그의 가족들도 함께 구원받는 축복을 받았지요. 또한 노아는 하나님의 크신 섭리를 이루는 귀한 도구로 쓰임 받았습니다.

노아가 하나님께 의로움을 인정받음으로 인해 받은 축복이 또 있습니다. 대홍수 심판이 시작될 때 지구를 두르고 있던 창조의 근본의 빛이 완전히 거두어졌지만 노아는 여전히 그 빛으로 둘린 공간에서 살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홍수 중에도 노아의 방주를 근본의 빛으로 둘러 주셨지요. 그래서 방주 안에 있는 사람들과 짐승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를 받았습니다.

창 1:3에 하나님께서 6일 창조 첫날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자 창조의 근본의 빛이 지구를 비롯한 첫째 하늘을 둘렀지요. 이에 지구는 육의 공간이면서도 어느 정도는 영의 공간의 법칙을 적용받았습니다.

이렇게 지구를 두르고 있던 창조의 근본의 빛은 아담의 범죄 시점부터 조금씩 거두어지기 시작했지요. 그러다가 대홍수의 시작과 함께 완전히 거두어졌던 것입니다. 그 결과 지구는 완연한 육의 공간이 되어 100% 육의 법칙이 적용되었습니다. 이에 지구에 있는 생물들은 본래 가지고 있던 육의 속성이 제한 없이 발현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사자나 호랑이 같은 맹수들은 잠재돼 있던 포악함을 드러냈습니다. 근본의 빛으로 둘렸을 때는 이런 맹수들도 온순했지만 이제 본성이 드러났던 것입니다. 또한 지구에 있는 모든 것이 육의 속성대로 더 빠르게 변질되고 썩게 되었지요.

노아는 홍수 이후의 이러한 환경 가운데서도 근본의 빛으로 둘린 공간에서 살았다는 사실입니다. 이에 대한 한 증거가 노아의 수명입니다. 노아는 홍수 이전의 사람들처럼 950세까지 살았지요.

이와 달리 본래 영생할 수 있었는데도 육으로 변질되어 멸절된 이들이 있지요. 바로 에덴동산에서 이 땅으로 내려와 임의대로 육을 취하다가 육의 사람이 된 존재들입니다. 그들과 그들의 후손들도 모두 대홍수 심판 때에 멸절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의 결과가 얼마나 다른지를 알 수 있지요. 잠 12:7에 “악인은 엎드러져서 소멸되려니와 의인의 집은 서 있으리라”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이처럼 노아는 죄악이 관영한 세대에서 하나님 앞에서 의를 굳게 지킴으로써 구원과 축복을 받았습니다. 성도님들도 불의한 일을 멀리하고 하나님 보시기에 의를 행하여 복된 길로 인도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이제 본문 2, 3절을 보시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방주에 더 태워야 할 짐승의 종류와 수량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너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을 네게로 취하며 공중의 새도 암수 일곱씩을 취하여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케 하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창 6:19, 20에서 하나님께서는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암수 한 쌍씩”을 방주로 이끌어 들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여기서는 정결한 짐승과 새들은 암수 일곱씩을, 부정한 짐승은 암수 둘씩을 더 태우라 하신 것일까요? 창 6:19에서 혈육 있는 모든 생물을 암수 한 쌍 씩 방주에 태우라 하신 것은 “그 생명을 보존케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종족 보존’을 위해 기본적으로 모든 짐승의 암수 한 쌍씩을 방주에 태운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보존케 하려고 택하신 동물들은 본능적으로 근본의 소리에 이끌려 방주로 나오도록 역사하셨지요.

그런데 본문 창 7:2-3에서는 하나님께서 특정 동물들을 지명하여 암수 일곱씩 또는 암수 둘씩을 태우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하나님께서 방주에 더 태울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노아가 택하여 취하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노아를 통해 인간 경작을 새롭게 시작하시겠다는 의지를 나타내신 것이지요. 또한 노아처럼 하나님의 참 자녀가 되면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음을 알려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참 자녀는 영의 차원에 있기에 그보다 차원이 낮은 육에 속한 짐승들을 능히 지배하고 다스릴 수 있지요. 사자 굴에 던져진 다니엘을 사자들이 해치지 못한 것도 같은 원리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러면 본문에 나오는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은 어떤 기준에 의해 구분이 됐을까요? 그 기준은 짐승들이 가진 근본 속성입니다. 모든 짐승은 처음 창조될 때에 사용된 토질에 따라 근본 속성이 다르지요.

예를 들어 어떤 짐승은 성질이 간사하고, 어떤 짐승은 포악하며, 어떤 짐승은 탐욕스러운 성질을 가졌습니다. 반면에 어떤 짐승은 순종적인 성질을 가졌고, 어떤 짐승은 순한 성질을 가졌으며, 어떤 짐승은 우직한 성질을 가지고 있지요.

이 땅이 하나님의 근본의 빛으로 둘려 있을 때는 짐승들에게 내재된 악한 속성이 발현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사나운 동물들도 당시에는 모두 온순했습니다.

그러나 대홍수 심판이 시작되면서 근본의 빛이 완전히 이 땅에서 거두어지자 토질에 내재된 근본 속성이 나오기 시작했지요. 이에 하나님께서는 근본 속성에 따라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구분하셨습니다. 그런데 모든 짐승이 이 두 범주에 드는 것은 아닙니다. 짐승들 중에 일부만 ‘정결하다’ 또는 ‘부정하다’ 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레위기 11장에 보면 ‘부정한 짐승’의 종류가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그러나 레위기에 나오는 부정한 짐승과 노아의 방주에 태운 부정한 짐승이 100%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레위기는 대홍수 심판으로부터 약 1천 년 후에 기록됐습니다. 레위기 기록 당시의 짐승들은 그 속성이 노아 시대의 짐승들과 또 달라졌지요.

대홍수 심판 후 사람이 다시 번성하면서 세상도 점차 악으로 물들어 갔습니다. 대홍수 심판이 끝난 후에는 하나님의 빛이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기에 짐승들도 근본 속성을 제약 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내었지요.

쉽게 말해 짐승들도 더 악해졌던 것입니다. 따라서 노아 시대에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의 기준과 레위기 기록 당시의 기준은 같을 수가 없지요.

노아 시대에는 부정한 짐승이 아니었는데 레위기 기록 당시에는 부정한 부류에 속하게 된 짐승들이 생겨났습니다. 예를 들면 ‘새’의 경우가 그러했습니다. 노아 시대에는 새들 중에서 부정하다 할 만큼 악성이 드러난 것이 없었습니다.

이에 본문 3절에도 ‘공중의 새’들도 정결한 짐승처럼 “암수 일곱씩을 취하여 그 씨를 온 지면에 유전케 하라” 하셨지요. 반면 부정한 새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또한 ‘공중의 새’라고 하여 새의 모든 종류를 암수 일곱씩 취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새 중에서 정결한 것만 암수 일곱씩 취하라는 의미이지요. 따라서 노아 당시에는 새들이 ‘정결한 종류’와 ‘나머지 종류’로 두 부류만 존재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반면 레 11:13-19에 새 중에서 가증하게 여길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명시돼 있지요. 이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새 중에서도 악한 종류들이 드러났다는 증거입니다.

참고로, 레위기 11장에 나오는 ‘가증한 동물들’은 그 형상이 타락한 그룹들을 닮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들은 먹지 말라 하셨지요. 타락한 그룹을 닮은 가증한 동물들은 대부분 독성을 갖고 있어서 사람에게 악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선해지기보다는 악해지도록 하지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본문 2절에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짐승은 암수 한 쌍을 방주에 태우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이란 표현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먼저, 말 그대로 ‘암수 일곱 쌍’ 곧 ‘열네 마리’를 의미합니다. 다음으로 ‘암수 세 쌍과 수컷 한 마리’ 곧 ‘일곱 마리’를 뜻하기도 합니다.

창 6:19에서 모든 짐승을 ‘종족 보존’을 위해 기본적으로 암수 한 쌍씩 방주에 태웠다 했지요. 이때 정결한 짐승은 한 쌍씩이 아니라 일곱 쌍씩을 방주에 태웠다는 사실입니다. 정결한 짐승은 소, 양, 염소 등 매우 유순한 동물들입니다. 이런 짐승들이 종족을 보존할 수 있으려면 맹수들보다 그 수가 많아야 하지요. 그래서 정결한 짐승은 종족 보존을 위해서 암수 일곱 쌍을 방주에 태웠습니다.

그런데 이외에 ‘또 다른 목적’으로 암수 일곱 마리, 곧 세 쌍과 수컷 한 마리를 방주에 더 태웠다는 사실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이를 테면, 정결한 짐승에 속하는 ‘양’은 종족 보존을 위해 일곱 쌍을 태웠습니다. ‘또 다른 용도’를 위해 세 쌍과 수컷 한 마리를 더 태웠지요. 그래서 방주에 태운 양은 총 스물한 마리가 됩니다. 이중 숫양은 열한 마리, 암양은 열 마리이지요.

그러면 ‘부정한 짐승’에 속하는 ‘돼지’는 몇 쌍이 방주에 실렸을까요? 기본적으로 태운 암수 한 쌍과 ‘부정한 짐승’으로서 태운 암수 한 쌍, 이렇게 암수 두 쌍, 총 네 마리이지요.

그런데 ‘정결한 짐승’에도, ‘부정한 짐승’에도 속하지 않는 종류가 더 많았습니다. 그들은 그냥 기본적으로 암수 한 쌍씩만 방주에 들어갔지요. 노아의 방주에 태워진 짐승들은 이처럼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 그리고 ‘나머지’, 이렇게 세 부류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정결한 짐승과 새들, 또한 부정한 짐승들을 방주에 더 태운 ‘또 다른 목적’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대홍수 심판 후, 인간의 삶에 그 동물들이 필요한 특별한 분야가 있었습니다.

먼저, 정결한 짐승의 용도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에 제물로 쓰기 위함입니다. 창 8:20에 보면 대홍수 심판 후 방주에서 나온 노아가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 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때는 아무 짐승이나 잡아 드린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정결한 짐승이나 새를 제물로 드렸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정결한 짐승’이란 곧 ‘제물’이 될 수 있는 짐승임을 알 수 있지요.

레위기 1장부터 7장에 제사법에 관한 규례가 자세히 나옵니다. 제물로 드릴 동물도 지정돼 있습니다. 짐승 중에서는 소, 양, 염소를, 새 중에서는 비둘기를 제물로 드릴 수 있지요. 이처럼 제물이 될 수 있는 동물의 종류는 네 가지에 불과 합니다.

노아 시대에 정결한 짐승의 종류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홍수 심판 후 노아가 첫 번째 번제를 드릴 때에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를 드렸다” 했습니다. 딱 소 한 마리만 드린 것이 아니라, 소 한 마리와 함께 양도, 염소도, 비둘기도 모두 한 마리씩 번제로 드렸던 것이지요. 이때 번제로 드린 정결한 짐승은 모두 수컷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정결한 짐승은 수컷을 한 마리 더 태우게 하셨던 것이지요.

만일 정결한 짐승들을 암수 한 쌍씩만 방주에 태웠다면 이렇게 번제를 드리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번제를 드렸다면 그 순간 소, 양, 염소, 비둘기는 멸종이 돼 버렸겠지요. 그러면 우리는 지금 소, 양, 염소, 비둘기를 볼 수 없게 되는 것이고요.

이에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정결한 짐승들은 종족 보존을 위한 열네 마리 외에 일곱 마리를 더 방주에 태우게 하셨던 것입니다. 대홍수 심판 이후에도 계속해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구약 시대의 제사는 인생들이 하나님과 교통하는 통로였지요. 홍수 심판 이후 이 땅에는 사람들이 급속하게 번성합니다. 이와 동시에 하나님께 제사드릴 일도 많아지지요.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앞으로 될 일을 아시고 사람들에게 필요한 수효만큼 정결한 짐승들을 더 태우게 하셨던 것입니다.

정결한 짐승의 용도는 이 외에 또 있었습니다. 정결한 짐승의 두 번째 용도는 바로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의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홍수 이후, 사람들에게 육식(肉食)을 허락하셨습니다. 바로 창 9:3에 “무릇 산 동물은 너희의 식물이 될지라 채소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홍수 심판 전까지는 채식만 했습니다. 그런데 홍수 심판 이후부터 고기도 먹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때 사람들에게 양식으로 허락된 동물들이 바로 정결한 짐승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이 말씀을 받은 노아와 그의 자손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지요. 그러니 아무 짐승이나 잡아먹는 게 아니라 정결한 짐승을 잡아먹을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이처럼 정결한 짐승은 사람의 양식으로도, 제사 때 드릴 제물로도 필요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방주에 태울 정결한 짐승의 수효가 다른 동물들에 비해 몇 배나 더 됐던 것이지요.

성도 여러분, 그러면, 부정한 짐승을 암수 둘씩 더 취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는 장차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의 양식으로 주기 위함입니다. 홍수 심판 이후 세월이 흐름에 따라 노아의 자손이 번성하면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도 생겨나게 됩니다. 그들은 임의대로 정결한 짐승이 아닌 다른 짐승들까지 잡아서 양식으로 삼지요.

하나님께서는 그처럼 사람들이 어떤 짐승을 양식으로 삼을 줄을 미리 아셨습니다. 이에 노아의 방주에 암수 한 쌍 씩을 더 태우게 하셨던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부정하다 하신 동물들은 장차 이방인들에게 양식이 될 짐승들이었지요. 부정한 짐승들도 그 종류가 많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암수 한 쌍씩을 더 태운다 하여 방주에 무리가 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잘 아십니다. 장차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을 위해서도 그들의 양식을 미리 준비해 주신 것을 보십시오. 마 5:45 후반절에도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아버지 하나님의 인자와 자비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십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받은 성도들 중에도 하나님의 사랑을 잘 알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자녀들이 믿음으로 무엇을 구할 때에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이러한 아버지의 마음을 잘 아셨지요. 그래서 마 7:9-11에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면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말씀하셨지요.

또한 롬 8:32에 사도 바울도 고백하기를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은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을 더 신실하게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필요도 채워 주실 수 있는 아버지께 믿음으로 구하시기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사랑을 베푸시되, 공의 가운데 이루시지요. 우리 편에서 구해야 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마 6:33에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말씀하셨지요. 이것이 우리 예수님께서 알려 주신 응답과 축복의 비결입니다.

먼저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기도해야 하지요. 즉 교회와 목자를 위해서 기도하고, 많은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다음 “그의 의를 구하라”는 것은 마음의 성결을 위해 기도하라는 의미이지요.

이것이 단지 기도하는 순서만을 가리킬까요? 물론 기도하는 순서도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기도하는 사람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기를 바라는 마음, 성결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큰가?’ ‘자신의 육의 문제 곧 물질의 축복이나 질병의 치료 등을 해결 받고자 하는 마음이 큰가?’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받으시지요.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어 독생자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셨습니다. 그 사랑이 너무나 고맙고 감사해서 어찌하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려는 마음, 아버지 하나님을 닮으려는 마음, 이러한 마음을 가진 자녀들을 찾으십니다. 여러분이 이런 마음으로 기도한다면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구한 것은 물론, 그 외에 구하지 않은 것도 더해 주실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자녀들에게 어찌하든 가장 좋은 것을 풍성하게 주기 원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을 믿고 늘 감사함으로 기도하여 응답과 축복을 받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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