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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랑장(6)
설교자 당회장 이재록 목사 설교본문 고전13:3 날짜 2007.05.06
사랑장 여섯 번째 시간입니다.

이 주간에는 부모님의 은혜를 기념하는 어버이날이 있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에는 어버이날, 부모님의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드리는 관습이 있지요. 우리 장년 성도님들은 혹시 자녀가 처음으로 카네이션을 달아주던 날을 기억하시는지요? 아마도 ‘내 자녀가 어느새 이렇게 커서 어버이날이라고 꽃을 달아주는구나.’ 하고 흐뭇해하셨을 것입니다.

그 카네이션이 설령 서툰 솜씨로 색종이를 오려붙여 만든 것이더라도 어떤 부모님들은 그것을 하루 종일 가슴에 달고 계시는 것도 봅니다. 이처럼 부모의 기쁨은 해산의 수고를 통해 자녀를 낳았을 때만 아니라 자녀가 자라나면서 부모의 사랑을 느끼고 감사할 때, 그리고 그것을 표현할 때 더욱 넘쳐나게 되지요.

아버지 하나님께서도 영혼들이 주님을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거듭나면 너무나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그 기쁨은 자녀의 믿음이 자라고 사랑이 커져서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그 감사를 표현해 나갈 때 더욱 크다는 사실입니다. 아버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의 마음을 그 어떤 것보다 가장 귀하게 여기시고요. 그렇기 때문에 지난 시간까지 증거해 드린 대로 아무리 유창한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이라도, 아무리 큰 능력과 지식, 믿음이라도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께는 아무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 하신 말씀을 증거합니다. 이 시간 말씀을 들으실 때 여러분 모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너무도 간절히 원하시는 영적인 사랑을 꼭 이루실 수 있기 바랍니다. 그래서 장차 천국에서 아버지 하나님을 뵈올 때 이 땅의 카네이션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기쁨을 안겨드리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난 시간에는 사랑 없는 구제는 아무 유익이 없음을 말씀드렸는데 사랑 없는 구제란 바로 남에게 드러내며 칭찬받고자 외식으로 하는 구제라 했지요. 이런 구제는 아무리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준다 해도 남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곧 후회하고 불평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땅에서 축복을 받을 수도 없고 장차 천국에서 상급을 받을 수도 없으므로 아무 유익이 없다 했지요.

반면에 참된 구제는 자신의 선행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중심의 사랑으로, 기쁨과 감사로 하는 구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구제를 기뻐하시고 놀라운 축복으로 갚아 주신다 했지요. 오늘 말씀드릴 희생의 분야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문 말씀 고린도전서 13:3 후반절에 보면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말씀합니다. 여기서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준다는 것은 자기 몸을 완전히 희생한다는 의미이지요. 그런데 자신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 주는 희생에 어떻게 사랑이 없을 수 있을까요?

참사랑으로 하는 희생에 대해 말씀 드리기에 앞서 비록 자신의 몸은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는 희생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말씀을 통해 여러분 각자의 마음을 잘 살피셔서 더 온전한 헌신을 드릴 수 있으시기 바랍니다.

첫째로 사랑 없는 희생의 모습은 주님의 일을 위해 실컷 수고해 놓고 입술로 원망과 불평을 쏟아내는 경우입니다. 자신의 온 힘과 정성, 시간, 물질을 다해 일했는데 남이 알아 주지 않고 칭찬해 주지 않으면 서운해하며 원망하는 것이지요. ‘내가 이렇게 애쓰고 수고했는데 어떻게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도 없을까?’ 한다거나, ‘어떻게 힘도 모아 주지 않고 보고만 있는가?’ 하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함께 열심 내어 주지 않는 사람을 보며 ‘저 사람은 너무 게으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목자를 사랑한다면 저럴 수 없는데.’ 하고 판단하며 정죄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이런 마음의 저변에는 사람에게 자신의 공로를 드러내어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과 ‘나는 이렇게 충성한다’는 높아진 마음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헌신은 오히려 화평을 깨고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할 뿐, 그 헌신이 아무 유익이 없지요.

두 번째로 사랑 없는 희생의 증거는 낙심하는 마음입니다. 드러내어 불평의 말을 하지는 않는다 해도 자신의 충성을 남들이 알아 주지 않으면 ‘나는 뭔가? 나는 있으나마나한 사람 같다.’ 하며 낙심하고 뜨거움이 식어져 버리지요. 자신을 희생하여 최선을 다해 한 일에 대해 남들이 부족함을 지적하기라도 하면 힘이 빠지거나 지적하는 사람들을 비난합니다.

또 자신보다 열매도 잘 내고 인정받으며 사랑받는 사람이 나타나면 시기하고 질투하기도 하고요. 그러니 아무리 열심히 일하고 충성해도 마음에는 참된 기쁨이 없습니다. 예전에는 성가대도 하고 기관장도 하고 여러 분야에서 뜨겁게 봉사도 했는데 이제는 결국 사명까지 놓아 버리기도 합니다. 이런 모습은 자신이 인정받고 칭찬받기 위해, 즉 어떤 대가를 바라고 일한 것임을 나타내지요.

충성할 당시에는 아무리 뜨겁다 해도 결국 이처럼 변질된다면, 또 그 입술에서 원망과 불평의 말이 나온다면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 충성을 기쁨으로 받으실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셋째로 사랑 없는 헌신의 또 한 가지 모습은 윗사람이나 남들이 볼 때만 열심을 내는 모습입니다. 누가 보지 않을 때는 게으르거나 맡겨진 일을 대충대충, 하는 시늉만 하지요. 그리고 눈에 잘 띄지 않는 일은 잘하려고 하지 않고 겉으로 드러나는 일만 하려고 합니다. 윗사람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어 칭찬받는 것에만 마음이 있기 때문이지요.

예를 들어 금식을 할 때도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16에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17-18절에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는 금식하는 자로 사람에게 보이지 않고 오직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보이게 하려 함이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말씀하셨지요.

그렇다면 왜 믿음이 있다 하고 말씀도 안다고 하는데 결과적으로는 이처럼 사랑 없는 희생을 하게 되는 것입니까? 바로 아버지 하나님과 영혼들에 대한 영적인 사랑이 없기 때문이지요. 즉 중심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것이 내 것이요 내 것이 아버지의 것이라 여기는 주인의식이 없이 일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농부가 자신의 밭에서 일을 하는 것과 삯을 받고 다른 사람의 일을 해 주는 것과는 다릅니다. 자신의 일을 할 때는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쉴 틈 없이 일하되 대충대충 하는 것이 아니라 어찌하든 더 많은 일을 하려고 하지요. 그런데 남의 집 일을 해 줄 때는 ‘어서 해가 저물어 품삯을 받아 집으로 돌아가 쉬었으면 좋겠다’ 하며 요령을 피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모든 일꾼들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것에 더 큰 애착을 갖기 마련이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도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과 영적인 사랑이 클수록 하나님의 일을 자신의 일로 여기고 마음 다해 충성하게 됩니다. 남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자신의 일처럼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삯을 받고 일하는 일꾼처럼 형식적으로 일하게 될 뿐이지요. 당장에 일한 만큼의 대가를 받지 못하면 불평과 원망이 나오는 것이고요.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탕자의 형이 그랬습니다.

어느 날, 집을 떠났던 동생이 모든 유산을 다 탕진하고 허름한 모습으로 집에 돌아오자 아버지는 최상의 대우로 이 아들을 맞아들이고 잔치를 벌였지요. 이 아버지의 큰아들, 곧 탕자의 형은 밭에서 돌아오다 이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누가복음 15:28에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즉 잔치가 열린 집으로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한 대로 화를 냅니다. 이에 아버지가 친히 나와서 들어오기를 권하지요.
그러자 이 큰 아들은 이어지는 29-30절에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하고 원망합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31-32절에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요. 즉 아버지는 자신의 모든 소유를 이 큰 아들에게 물려주려 했을 만큼 큰 아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이 아들은 이런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아버지의 것이 곧 자신의 것이라는 의식이 없이 자신은 늘 아버지를 위해 고생만 한다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아버지가 자신의 수고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생각되자 원망하고 불평했던 것입니다. 더구나 다 죽다 살아 돌아온 동생을 시기하기까지 하지요.

이 큰 아들은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하고 말했고 잔치가 벌어진 날도 밭에 있다가 돌아오는 길에 이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런 정황들로 미루어 볼 때 이 큰 아들이 평소 얼마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순종하며 성실히 일했는지 짐작할 수 있지요. 그런데 결국 원망하고 불평했다는 것은 아버지에 대한 진정한 사랑으로 일한 것이 아님을 보여 준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큰 아들의 모습이 혹시 나에게는 없는지 여러분도 자신을 살펴보실 수 있기 바랍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충성해 왔다 하는 일꾼들 중에는 ‘내가 지금까지 교회를 위해 희생한 것이 얼만데. 교회가 어려움을 당할 때도 어찌하든 교회를 지키며 목자의 힘이 되고자 했는데.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는구나.’ 하고 서운해하기도 합니다.

‘오히려 교회에 늦게 온 누구누구가 더 인정받고 사랑을 받는구나’ 하고 낙심하기도 하고요. ‘나는 더 이상 할 일이 없는 것 같으니 이제는 뒤에 물러나 있어야겠다.’ 하고 소극적인 자세를 갖기도 합니다.

만약 이런 마음이 든다면 이제까지 충성하고 헌신해 온 것이 과연 참이었는가, 사랑을 가지고 한 것인가를 잘 깨달아 보아야 하지요.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께 드려온 모든 것은 반드시 축복으로 갚아 주실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신앙의 연륜도 있고 직분을 가진 일꾼일수록 주인 된 마음으로 성도들을 섬기되, 배울 것은 낮아진 마음으로 배우신다면 덕과 사랑을 겸비한 충성된 일꾼이 되실 수 있지요. 그러면 그 희생과 충성이 더 풍성한 열매로 맺히게 되고요.

그러므로 우리 성도님들은 골로새서 3:23-24에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말씀하신 대로 무슨 일을 하든지 항상 주께 하듯 하여 장차 천국을 유업으로 받으실 수 있기 바랍니다.

참된 희생을 하려면 무엇보다 마음에 영적인 사랑이 온전히 임해 있어야 합니다. 그 마음에 참된 사랑이 가득한 사람은 누가 보든 보지 않든, 자신을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자신의 모든 것을 다해 묵묵히 헌신합니다. 마치 초가 자신의 몸을 태워 어둠을 밝히듯 아낌없이 자신의 전부를 내어 주려 합니다. 초가 자신의 전부를 불태우되 소리를 내지 않듯이 자신을 들레지도 않지요.

우리 예수님은 이런 희생으로 진정한 희생의 본이 되어 주셨습니다. 구약에 보면 구세주로 오실 예수님을, 죄인들을 위한 화목제물, 곧 속죄의 어린 양에 비유하여 예언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구약의 제사를 보면 죄인을 대신하여 속죄의 제물로 드려질 짐승을 잡되 모든 피를 쏟게 하고 기름 부분을 제단 불에 살라 향으로 드리게 하지요.

우리 예수님께서도 이런 희생의 제물과 같이 인생들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마지막 물과 피 한 방울까지 다 흘리시고 진액을 다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희생이 헛되지 않아 많은 영혼들이 구원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희생에는 예수님의 온전한 사랑이 담겨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심으로 이 땅에 머무시는 동안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 힘쓰셨습니다.

요한복음 19:30에서 보면 우리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 말씀하시고 운명하신 것을 볼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생명을 다하시기까지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 사셨지요.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 순간에도 영혼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올리십니다. 마지막 피 한 방울을 흘리시던 그 순간까지 오직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해 사셨던 것이지요. 그러시면서도 결코 자신을 들레거나 스스로를 높여 영광을 받고자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셨지요.

하나님께서는 빌립보서 2:9-10에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말씀한 대로 이런 주님을 친히 높여 주시고 영광스런 자리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처럼 어떤 욕심이나 거짓이 없이 깨끗한 마음으로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높여 주시고 영광의 자리로 이끄십니다. 마태복음 5:8에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을 직접 뵐 수 있는 영광을 주시지요. 그러므로 우리 모든 성도님들은 이런 예수님의 마음을 이루어 참된 희생을 드리심으로 반드시 하나님을 뵙는 영광에 이르시기 바랍니다.

우리 만민의 성도님들은 주변 분들로부터 유별나게 신앙생활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으십니다. 주일을 온전히 지킬 뿐 아니라 금요일은 철야로 한밤을 지새우는가 하면 매일 밤 성전에 나와 다니엘철야를 합니다. 이 외에도 수요 예배, 찬양 예배, 구역 예배와 각종 기도회에 열심히 참석하시는 분들이 많지요. 일꾼 되신 분들은 영혼들을 돌보시느라 쉼 없이 심방하십니다.

또 주의 일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매일 아침에는 새벽같이 일어나 일터에 나가셔서 하루 종일 열심히 일을 하시지요. 휴일이 되면 ‘이제 조금 쉬어야지’ 하는 것이 아니라 신문을 돌리시며 전도를 하십니다. 이처럼 몸과 마음과 정성, 시간과 물질을 오직 아버지 하나님 나라를 위해 드리시는 분이라면 온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 정도로 충성하신다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이런 우리 성도들의 모습은 어느 교회의 성도님들을 닮으셨을까요? 바로 초대교회의 성도들을 닮으셨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늘 모이기를 힘쓰고 말씀의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쉬지 않았지요. 그리고 오직 복음만을 위해 살았습니다. 이들은 평생 이런 희생의 삶을 살았을 뿐 아니라 최후의 순간에는 순교의 피를 흘린 이들이 많지요. 그 희생이 얼마나 진실한 희생이었던지 이들은 배고픈 사자가 달려드는 순간에도, 십자가에 못 박히는 순간에도 결코 원망하거나 후회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기쁘게 찬송하며 주님 앞에 최후의 순간까지 자신을 드렸지요. 천국의 시민권을 받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이처럼 기뻐하며 감사했고 주님을 뜨겁게 사랑했던 것입니다.

하루하루 온몸과 마음을 다해 헌신하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이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입술에 감사와 찬양이 넘친다면 장차 천국에서 받을 영광과 상급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러나 ‘왜 이렇게 고생하며 가야 하나, 좀 쉬고 싶다.’ 하거나 ‘나름대로 열심히 달려가고 있는데 마음에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니 힘이 빠진다.’ 하는 분이 계신지요?

그러나 여러분은 죄악으로 관영한 이 마지막 때에 천국을 소망하며 달려가시되 천국에서도 가장 좋은 새 예루살렘을 푯대로 받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소망이 더욱 넘치셔서 무엇보다도 주님과 영혼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으로 참된 희생을 이루실 수 있기 바랍니다.

아직 온전한 사랑으로 희생하지는 못한다 해도 온몸으로 희생하며 헌신하는 여러분의 모습이 하나님께는 참으로 귀하지요.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는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해 봉사하고 충성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신속히 벗어버리시고 우리를 위해 초처럼 녹아지셨던 주님의 사랑과 희생을 이루실 수 있기 바랍니다. 그래서 장차 주님께 큰 상급을 받으셔서 참 본향 새 예루살렘에 돌아갔을 때 아버지 하나님의 영광이요 기쁨이 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계 5대 부자 안에 드는 한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의 아들이 경비행기를 타고 사막을 지나다가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아버지가 수색대를 조직하여 사막을 샅샅이 뒤진 결과, 아들의 생존 여부만을 확인할 수 있었지요.

아들을 구하기 위해 기도하며 생각한 끝에 아버지는 아들이 구출될 때까지 살아남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우선 수백만 장의 전단을 사막에 뿌리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 한정된 좁은 공간에 무엇을 써야 할 것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무엇을 먹고, 사나운 짐승을 어떻게 피해야 하는지 등 ‘생존 전략들’을 쓸까 하고 고민하다가 아버지는 결국 “아들아 너를 사랑한다.” 하고 썼습니다.

며칠 후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기진맥진하고 좌절감으로 죽어가던 아들이 이 전단을 받아 보게 되었습니다. 이 아들은 ‘아빠가 나를 사랑한다. 그렇다면 아빠는 반드시 나를 찾아낼 것이다.’ 하고 생각하며 용기를 가지고 버텼고 결국 수색대에 의해 구출되었습니다. 이 아들을 살린 것은 ‘사막에서의 생존 전략’이 아니라 바로 아버지의 진실한 사랑이었지요.

광야 같이 험난한 세상에서 헤매다가 쓸쓸하게 죽어가고 있는 많은 영혼들에게 여러분은 이 사랑의 전단을 전달할 사명을 받으셨습니다. 오늘 이 시간까지 사랑의 중요성을 말씀드렸는데 세상의 아름다운 그 어떤 것보다 이 사랑이 가장 중요하며, 사랑이 없으면 그 무엇도 아무 가치가 없음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여러분 자신이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셔서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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