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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랑장(7)
설교자 당회장 이재록 목사 설교본문 고전13:4 날짜 2007.06.03
사랑장 일곱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시간까지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사랑이 왜 가장 중요한지 ‘사랑의 중요성’에 대해 들으셨습니다. 오늘부터는 사랑이란 과연 어떤 것인지 ‘사랑의 개념’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이 사랑은 여러분이 너무나 사모하시는 영적인 사랑을 의미하지요.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참사랑을 하고 싶어도 참사랑, 곧 영적인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므로 진정한 사랑의 기쁨을 잘 누리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복음을 전할 때도 보면 참사랑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므로 주님께서 값없이 주신 구원의 은혜를 선뜻 믿지 못하기도 하지요. 오히려 하나님의 사람들을 배척하거나 핍박하기도 합니다. 이런 모습을 볼 때 지금은 참사랑을 찾아보기 어려운 마지막 때임을 알 수 있지요.

그러나 여러분은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진정한 사랑, 곧 영적인 사랑에 대해 듣고 배우고 계십니다. 또한 로마서 5:5에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하신 대로,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실 수 있지요.

오늘도 말씀을 잘 들으시므로 여러분 모두가 영적인 사랑은 어떤 것인지 밝히 아시며 또한 그 사랑을 마음으로 느껴보실 수 있기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 결단하셔서 이 사랑을 여러분의 마음에 신속히 이루심으로 참사랑에 목마른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으로 인해 ‘진정한 사랑은 정말 존재하는구나!’ 느끼고 고백할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말씀 전반부에 “사랑은 오래 참고” 말씀한 대로 사랑은 오래 참는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오래 참아야 한다는 것일까요? 바로 사랑하는 데 있어서 만나게 되는 여러 가지 시련들과 ‘나 자신’에 대해 오래 참아야 하지요.

여러분이 상대를 사랑하려고 하다 보면 오히려 여러분에게 돌을 던져 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랑스럽기는커녕 ‘어떻게 저런 사람을 사랑할 수가 있나?’ 생각이 드는 사람들도 있지요. 그러나 말씀대로 순종하여 영적인 사랑을 하려면 이런 사람들까지도 참고 사랑해야 합니다.

상대가 이유 없이 나를 헐뜯고 미워할지라도 자신의 마음을 다스려서 참고 상대를 사랑해야 하지요.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랑하고자 할 때 만나게 되는 모든 어려움을 참고 견디는 것이 바로 오래 참음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아셔야 할 것은 이 사랑장의 ‘오래 참음’은 갈라디아서 5:22에 나오는 오래 참음과 그 의미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22-23에 보면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하고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나옵니다. 여기서 오래 참음은 ‘하나님 나라와 의를 위해 범사에 오래 참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상대를 사랑하기 위한, 개인적인 차원의 오래 참음인 사랑장의 오래 참음보다 더 큰 범주의 개념이지요.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 하나인 오래 참음은 크게 세 가지 분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로 마음에서 비진리를 버리고 마음을 진리로 개조해 나가기까지의 오래 참음이 있습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 마음에 쌓아온 비진리들을 다 버리려면 얼마나 많은 인내가 필요하겠습니까?

두 번째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신과 다른 상대를 이해해 주고 상대의 유익을 구해 주며 화평함을 이루기 위한 오래 참음입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주실 약속, 즉 기도의 응답, 구원 등을 받기 위한 오래 참음이 있지요. 어떤 것을 응답받으려면 응답을 받을 때까지 마음에 요동함이 없이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사랑장의 오래 참음은 상대를 사랑하기 위해 참는 것을 뜻하므로 결국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 하나인 오래 참음의 범주 안에 포함되지요.

이처럼 성경 말씀 가운데 똑같아 보이는 개념들도 성령의 감동함 가운데 영적으로 풀면 그 의미가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알아서 각각의 개념을 각 상황에 알맞게 적용하면 신앙생활에 더 유익을 얻을 수 있게 되지요.

그럼 지금부터 오래 참는 것이란 과연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마태복음 5:44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말씀하십니다. 원수는 누구입니까? 사전에는 ‘원한이 맺힐 정도로 해를 끼친 사람’이라 나와 있는데 이처럼 원수란 나에게 큰 해를 끼친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원수라도 사랑할 수 있겠는지요?

또한 주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또 복음을 전한다고 해서 애매히 여러분을 욕하고 핍박하는 이를 위해 기도할 수 있으십니까? 죄인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이 말씀대로 원수라도 사랑하시고 핍박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원수는 누구입니까? 바로 어둠의 악한 영들과 그들에게 순종하는 죄인들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기 이전의 우리들도 예수님의 원수였던 것이지요. 아담의 범죄 이후 모든 인생들은 하나님의 원수인 원수 마귀에게 순종하여 범죄함으로 원수 마귀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위배되는 죄를 지어 나갔지요.

이런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자 많은 인생들이 어떻게 행했습니까? 예수님은 천국 복음을 전해 주시고 병을 고쳐 주시며 먹을 양식을 주시는 등 오직 사랑만을 베푸셨습니다. 그럼에도 오직 선한 일만 행하신 우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으며 예수님이 자신의 죄의 짐을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줄도 모르고 오히려 예수님을 조롱하고 멸시했지요.

우리 예수님은 이런 인생들이라도 잠잠히 참아 주셨고 누가복음 23:34 전반절에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신 대로 오히려 그들을 위해 중보의 기도를 올리셨던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원수가 된 인생들을 이처럼 오래 참으시고 사랑하신 결과 어떤 일이 있어났습니까? 주님을 구세주로 믿고 영접하는 사람마다 원수 마귀의 종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처럼 오래 참는 사랑의 힘은 위대하지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얼마나 오래 참고 계신지요? 까닭 없이 여러분을 헐뜯고 미워하는 사람이라도 참고 사랑하십니까? 아니면 원수도 아닌 내 아내, 남편, 자녀, 믿음의 형제들조차 ‘참는 것이 너무 어렵다.’ 하시는지요?

마태복음 5:39-40에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라” 말씀하십니다.

요즘은 상대가 자신의 신변이나 재산에 조금이라도 해를 끼치면 많은 사람들이 법에 송사하는 것을 봅니다. 그 상대가 아내, 혹은 남편, 혈육을 나눈 부모, 자녀인 경우도 많지요. 그냥 참고 가만히 있으면 바보처럼 산다고 조롱을 받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오히려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라” 하십니다.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주라” 하시지요. 즉 자신에게 악을 행하는 자에게 똑같이 악으로 갚지 말고 참아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상대에게 더 선을 베풀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혹여 여러분 중에 “억울하고 분해서 어떻게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까?” 하실 분이 계신지요? 여러분에게 믿음과 사랑이 있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에 대한 믿음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을 죽게 한 죄인들마저 오래 참으시고 오히려 긍휼을 베푸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진심으로 믿는다면 나에게 아무리 큰 해를 끼치는 사람이라도 용서할 수 있지요. 그리고 이처럼 독생자 아들을 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아버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생명을 아낌없이 내어 주신 주님을 사랑한다면 참아 주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래 참는다는 것은 과연 얼마 동안 참는 것을 의미할까요? 어떤 분들은 미움, 혈기 등의 감정을 마음에 억지로 꾹꾹 눌러 참고 쌓아 놓았다가 한계에 다다르면 폭발해 버리고 마는 것을 봅니다. 내성적이어서 겉으로는 표현하지 못한다 해도 미운 사람으로 인해 심히 가슴앓이를 하므로 소위 ‘화병’이라 말하는 병이 들기도 하고 여러 가지 스트레스성 질환들을 앓기도 하지요.

이런 참음은 스프링을 잠시 눌러 놓았다가 손을 떼면 다시 본 모양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오래 참음이란 변함없이 끝까지 참는 것이지요. 미움, 서운함 등을 마음에 쌓아 두는 것이 아니라 이런 감정이 생기게 하는 근본 악들을 빼내 버리고 자비와 사랑으로 승화시켜 나가는 것이 영적인 의미의 오래 참음인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미움, 시기, 질투 등의 비진리가 없고 영적인 사랑만 가득하게 되면, 곧 마음을 영으로 이루면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이 조금도 어렵지 않습니다. 반면에 자신의 마음 안에 미움, 다툼, 시기, 질투 등의 비진리가 가득 차 있으면 아무리 좋은 사람을 보아도 단점만 보이고, 싫고 미운 마음이 먼저 드는 것입니다. 마치 검은 안경을 낀 사람은 바라보는 대상도 다 어둡게 보이는 것과 같지요.

그러나 마음 안에 사랑이 가득하면 아무리 이해 못할 사람이라도 사랑스러워 보입니다. 어떤 허물이나 단점이 있어도 상대가 싫지 않고 심지어 나를 미워하고 악하게 행동한다 해도 미운 마음이 전혀 들지 않는 것입니다. 이처럼 오래 참을 수 있는 마음은 바로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라도 끄지 않으시는 주님의 마음이지요.

복음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자신을 돌로 치는 자들을 위해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하고 중보기도를 올렸던 스데반 집사와 같은 믿음의 사람들의 마음이고요.

우리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사랑하는 것이 어려우셨겠는지요? 결코 어렵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예수님의 마음은 진리 자체였기 때문이지요. 한 번은 제자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마태복음 18:21에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22절에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하고 대답하십니다.

이 말씀은 일흔 번씩 일곱 번, 즉 70X7=490번만 용서하라는 의미가 아니지요. 7은 영적으로 완전함을 의미하는 수입니다. 따라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것은 완전히 용서하라는 뜻이 되지요. 이 대화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가 무한하심을 느껴볼 수가 있습니다. 물론 하루아침에 미워하는 마음을 사랑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끊임없이 노력해 나가야 합니다.

예를 들어 에베소서 4:26에 보면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했는데 분을 내는 사람이라면 믿음의 1단계나 2단계의 믿음에 속한 사람이지요. 이처럼 아직 믿음이 연약하므로 혹 분을 냈다 하더라도 해가 지도록 오래, 즉 하루 종일 그 분을 품고 있지 말고 털어버리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각자의 믿음의 분량 안에서 감정, 혈기 등 비진리를 버리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나가면 된다는 말씀이지요. 마음에서 비진리를 모두 벗어버림으로 마음에 악이 없어지면 당연히 분을 품지도 않게 됩니다. 따라서 분을 내거나 분을 참을 일도 없지요.

그런데 과연 천국에는 ‘오래 참다’라는 말이 있을까요? 천국에는 눈물, 슬픔, 고통이 없습니다. 악이 없고 선과 사랑만 있어서 상대를 미워할 일도 없고 화를 내거나 짜증낼 일도 없지요. 따라서 어떤 감정을 억누르고 다스릴 일이, 즉 오래 참을 일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랑 자체이신 아버지 하나님께도 당연히 오래 참으실 일이 없지요. 그런데도 굳이 ‘사랑은 오래 참는 것’이라 표현하신 것은 사람에게는 혼이 있어서 그 생각과 틀에 가장 부합하게 이해시켜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마음에 악이 없고 선한 사람일수록 그만큼 오래 참을 일도 없지요. 여러분은 과연 어떠하십니까? 이제는 오래 참아야 할 상대가 별로 없으시겠지요?

영적인 사랑을 이룬 만큼 부족함이 있는 영혼이라도 억지로 참는 것이 아니라 평안함 가운데 사랑으로 상대가 변화되기를 기다려 주는 마음일 것입니다. 혹여 아직 억지로 오래 참아야 하는 상대가 있다면 순간순간 진리의 말씀을 붙잡고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셔서 참고 인내하며 승리해 나가실 수 있기 바랍니다. 그러면 마음이 점점 진리로 일구어지고 영적인 사랑이 자라가지요. 물론 마음의 깊은 죄성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불같이 기도할 때 벗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미운 사람이라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고 더욱 선을 베풀고자 하는 노력 또한 너무나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이처럼 행해 나가면 어느새 마음에서 미움이 사라지고 상대를 사랑하게 되지요. 그러면 마치 천국에 있는 것처럼 너무나 행복한 삶을 살게 됩니다.

누가복음 17:21 후반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말씀하셨지요. 사람들은 너무나 행복하면 천국에 와 있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마음에 천국이 있다는 것은 마음에서 모든 비진리를 벗어 버림으로 선과 사랑만 가득하게 된 상태를 말합니다. 이런 상태가 되면 오래 참을 일이 없고 모두를 사랑하기 때문에 항상 기쁘고 행복하며 충만함이 넘치게 되지요.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선하고 사랑이 많은 자녀를 너무나 기뻐하십니다. 사도행전 13:22에 보니 “폐하시고 (즉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사울을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신 말씀이 나옵니다. 다윗은 이처럼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은 어떻게 이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었을까요? 다윗은 악한 자를 대적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른편 뺨을 치는 자에게 왼편 뺨도 돌려대는 선을 베풀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울 왕은 자신보다 다윗이 백성들의 칭송을 듣고 사랑을 받자 아무 죄가 없는 다윗을 죽이려 했지요. 다윗은 이런 사울을 피해 갖은 고생을 하며 도망 다녀야 했습니다.

사무엘상 24장에 보면 사울 왕이 다윗을 잡으러 엔게디 황무지에 갔던 사건이 나오지요. 다윗을 추격하던 사울 왕과 그 일행은 마침 다윗 일행이 숨어 있던 굴속에 들어가 쉽니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 굴의 깊은 곳에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지요. 다윗이 사울을 없애기에 충분한 기회가 온 것입니다.

사무엘상 24:4 전반절에 보니 다윗의 사람들은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붙이리니 네 소견에 선한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날이니이다” 말하며 다윗에게 사울 왕을 죽일 것을 권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이 잠든 사이 사울의 겉옷자락만을 가만히 베었지요.

사울에게 어떤 해를 가한 것도 아닌데 다윗은 마음이 찔려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의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며 자기 사람들이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리고 다윗은 무사히 그곳을 떠나가는 사울을 따라가 사울의 뒤에서 그를 부릅니다. 사울이 돌아보자 다윗은 땅에 엎드려 절을 하지요.

9절 이하에는 다윗이 사울을 “나의 아버지여!” 하고 부르며 자신은 결코 사울을 해할 마음이 없음을 고백하는 감동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다윗은 죄 없는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 앞에 자신을 오히려 죽은 개와 벼룩에 비유하며 겸비하게 낮춥니다. 이런 다윗의 선한 행함에 결국 마음이 악한 사울도 감동을 받고

16-17절에 “다윗이 사울에게 이같이 말하기를 마치매 사울이 가로되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목소리냐 하고 소리를 높여 울며 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하고 고백하지요. 다윗은 이처럼 악한 사울마저도 감동시키는 오래 참음의 사랑을 베풀었던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이런 다윗을 더욱 합당히 여기셨고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셨으며 다윗을 통해 이스라엘을 견고하게 하셨지요.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결코 선행을 잊지 않으시고 행한 대로 갚아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자녀들의 이러한 선행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더 창대하게 이루어 가시지요.

저와 우리 만민의 성도님들은 개척 이후 참으로 애매히 욕을 받고 핍박을 받으며 거짓 누명을 쓴 일이 많았습니다. 그럴지라도 세상의 법에 따라 악을 행하는 이들을 정죄하고 대적한 것이 아니라 원수라도 사랑하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랑 가운데 오래 참음으로 선대했지요. 육적으로 볼 때는 악한 자들에게 대항하지 않는 것이 손해를 보는 것만 같고 미련한 것 같아 보이지만 이를 통해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이 제단에 큰 부흥과 놀라운 성령의 역사들을 나타내 주셨던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악을 행하는 사람이라도 오래 참고 사랑하는 자녀들을 너무나 기뻐하시고 사랑하십니다. 이는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께서 마태복음 5:45 후반절에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하신 대로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지요.

악인이라도 변화되기를 바라고 오래 참으심으로 해를 비춰 주시며 비를 내려 주시는 인자와 긍휼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악한 자에게 악으로 대하면 시편 37:8에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 불평하여 말라 행악에 치우칠 뿐이라” 말씀한 대로 똑같이 악한 사람이 되지만

반면에 이어지는 9절에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하신 대로 상 주실 하나님을 바라봄으로 악한 사람이라도 오래 참고 용서하고 사랑하면 장차 천국에서 땅, 곧 아름다운 처소를 차지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모두가 이 모든 말씀을 소망 삼으셔서 마음 안에 영적인 사랑만을 가득히 채우실 수 있기 바랍니다. 그래서 참사랑을 믿지 못하는 많은 영혼들이 여러분으로 인해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므로 주님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기를 사랑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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