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트위터 페이스북 메일보내기 스크랩하기 바로가기복사 PDF
제목 위로부터 난 지혜(4)
설교자 당회장 이재록 목사 설교본문 약3:17 날짜 2008.08.17
지난 시간에는 관용의 의미와 실제적인 사례를 살펴보았습니다. 관용은 진리가 마음에 풍성하게 임하면서 동시에 진리의 자유함이 있기 때문에 가진 것을 다 내어줄 수 있는 마음입니다. 이번 시간에는 관용에 속하는 진리의 자유함에 대해 좀 더 알아보고 관용과 짝이 되는 양순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1. 관용에서 나오는 지혜

1) 진리의 자유함
요한복음 8장 32절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했습니다. 진리 안에 살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진리가 족쇄처럼 여겨지지만, 진리를 알고 온전히 행하는 사람은 그 안에서 자유로움을 느낍니다. 죄를 짓고 도망치는 사람은 경찰을 보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지만, 법을 잘 지키는 사람은 경찰이 있어도 아무 상관이 없고 필요할 때 도움을 요청할 수 있으니 오히려 가까이 있는 것이 더 든든하게 느껴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진리 안에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법이 그의 사랑이며 축복의 통로임을 알기에 두려움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을 온전히 지킬 믿음이 없는 사람은 안식일을 지키라는 말이 부담스럽게 들립니다. 안식일에는 장사하지 말라거나, 세상 오락을 취하지 말라는 것 등이 모두 족쇄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 중심에서 안식일을 온전히 지키는 사람은 이런 말씀이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적 주권을 인정해 드림으로, 자신이 받는 평안과 축복을 알기 때문입니다.
범사에 형통케 하시므로 한 주간 재앙이나 사고 없이 지킴을 받을 수 있고, 안식일에 장사를 쉰다고 해서 무조건 손해만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익을 얻게 해주실 수도 있습니다. 6일 만에 7일 동안의 수입 이상을 벌게 하실 수도 있고, 불필요하게 새어나갈 지출을 막아주실 수도 있습니다. 질병과 사고가 없게 하시므로, 병원비나 약값도 들지 않고 사고로 인해 물질이 새어나갈 일도 없게 됩니다. 이처럼 안식일을 지키라는 진리를 알고 행하면, 영혼이 잘 되는 축복을 받아 행복하고 평안하니 자신의 삶이 자유롭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미움을 버리면 그 마음이 가볍고 행복해집니다. 예전에는 미움으로 인해 싸움이 있으니, 하나님 앞에서도 민망하여 마음이 무거웠고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미움이라는 죄성을 버리고 나면, 이렇게 좋은데 왜 진작 버리지 않았을까 생각할 정도로 행복하게 됩니다. 진리가 죄의 멍에에서 풀어주고 죄의 짐에서 자유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진리가 마음에 가득하면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상대에 대해서도 자유함을 줄 수 있습니다. 상대가 진리대로 살지 않는다 해서 내 생각에 맞춰 정죄하고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대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음에 진리가 가득하다는 것은 진리가 무엇인지 머리로 아는 것을 뜻하는게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8장 1절 후반에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했습니다. 머리로만 진리를 아는 사람은, 코끼리의 다리를 만져보고 코끼리라는 동물은 마치 기둥처럼 생겼다고 생각하는 장님과 같습니다. 지극히 작은 것을 알면서, 마치 모든 것을 아는 사람처럼 교만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상대가 섬김 받기 원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일 때, 금방 상대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마음이 됩니다. 저 사람은 참 마음이 높구나 생각하면서, 정작 자신이 "형제를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을 범하고 있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반면에, 마음에 진리가 임해있는 사람은 상대를 그의 믿음의 분량에 맞추어 바라봅니다. 말씀으로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지만, 상대의 허물과 비진리를 사랑으로 품어주고 덮어주는 것입니다. 나에게도 수많은 허물이 있었지만 하나님 앞에서 긍휼히 여김을 받은 것처럼 상대를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2) 명 철
이렇게 진리가 풍성히 임하고 진리의 자유함 속에 넉넉한 마음이 되면, 범사에 밝은 길을 볼 수 있는 명철이 임하게 됩니다. 이는 예수님의 경우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진리의 자유함 속에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마음을 전해주셨습니다. 여러 가지 비유를 통해 깨닫기 쉽게 설명하며 영육 간에 상하고 찢긴 영혼들을 고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는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에 대한 사건이 나옵니다. 어느 날, 유대인들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한 여인을 예수님 앞에 끌고 왔습니다. 이 여인을 어떻게 할지 말하라는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에 의하면, 간음한 여인은 돌로 쳐 죽여야 합니다. 그러나 만약 예수님께서 "돌로 치라" 하면, 그들은 예수님을 향해 "사랑이 없다" 할 것입니다. 반면에 "용서하라" 하면, "율법을 무시하는 사람"이라고 정죄할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아무 대답 없이 바닥에 무엇인가를 쓰기 시작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답변을 재촉하자,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땅에 쓰는 것을 계속 하셨습니다. 군중들은 예수님께서 하나하나 써내려 가는 것을 보면서, 차마 돌을 던질 수가 없었습니다. 바닥에 쓰인 내용은 바로 그들에게 해당되는 죄목이기 때문입니다. 양심의 가책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하나 그 자리를 떠나고, 결국 여인과 예수님만 남게 됩니다. 당시의 상황은 요한복음 8장 10-11절에 잘 나와 있습니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여기서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수치와 두려움 속에서 떨고 있다가 극적으로 생명을 건진 여인의 마음에 깊이 새겨졌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온전히 진리의 마음을 가지셨기에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밝히 알아 진리 안에서 자유함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죄인들의 마음을 이해하며 기꺼이 긍휼을 베풀어주실 수 있는 관용의 마음도 있었기에 "죄 없는 사람이 돌로 치라" 하시며 하나님의 참 뜻을 깨우칠 수 있는 지혜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음에 진리가 온전히 임하지 않았다면, 정죄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이러한 답을 하실 수 없습니다.
만약 여인이 불쌍하다 해서 무조건 "살려주라" 하셨다면, 율법을 거역하도록 가르친다는 정죄를 받아 매우 곤란한 상황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온전히 이루셨고, 율법의 근본 취지를 아셨기에 모든 사람을 살리는 지혜를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디모데전서 2장 4절에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정말로 원하시는 뜻은 죄인에게 벌을 주는 것이 아니라 회개시켜 구원받게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율법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죄인이 불쌍하다고 용서만 해주면, 그 죄가 누룩처럼 전체에 퍼져 더 많은 사람들이 멸망으로 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 형벌을 정해주신 것입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깨달아야 할 지혜는 예수님께서 군중들의 잘못을 말로 판단하지 않고 바닥에 쓰셨다는 데 있습니다. 군중들에게 직접 말하여 정죄하고 그들의 마음에 찔림이 되게 하신 것이 아니라, 바닥에 써진 자신의 죄목을 보고 스스로 깨달아 물러가게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누군가의 허물을 말하면, 이를 듣는 사람도 즉시 상대방을 무안 줄 때가 있습니다. "너도 이러이러한 잘못이 있지 않으냐" 하고 말문을 막아 버리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너나 잘해라" 하는 것입니다. 물론 남의 허물을 말한 사람도 잘못입니다. 그러나 상대가 잘못을 한다고 해서, 상대의 허물을 드러내 면박을 주는 것도 하나님 앞에서 옳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악으로 악을 갚는 것이고, 자신도 똑같이 판단하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또한 그 말을 듣는 상대방은 비록 자신이 잘못한 것이 사실이라 해도, 오히려 감정과 서운함을 품게 됩니다. 진리를 마음에 이루지 못하고 머리에만 지식으로 쌓으면, 그 지식으로 상대에게 상처를 주기 쉽습니다.
누군가 질병이나 연단을 겪는 것을 보고, "그럴 줄 알았다, 돌아봐라" 하는 말로 상대를 정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특히 가까운 사람이나 가족들에게 더 쉽게 그런 말을 합니다. 상대가 선한 사람이라면 이런 말을 들어도 사랑의 권면으로 받고 돌이킬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고통 받는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그런 말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욥이 연단을 받을 때 친구들에게 반발한 것처럼, 오히려 감정과 서운함이 나올 뿐입니다. 나는 분명히 상대를 위해 좋은 말을 해줬는데, 상대는 왜 나를 불편하게 여기는가? 이런 고민을 하는 분이 있다면, 바로 이런 경우는 아닌지 깨달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머리에만 쌓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 이루어야 합니다. 그럴 때라야 상대를 넉넉히 품어줄 수 있고, 상대의 마음에 있는 어둠도 물리쳐 줄 수 있습니다. 관용의 마음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습니다. 비록 상대가 악으로 행한다 해도, 판단 정죄하거나 함부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 또한 소중한 한 영혼으로 여기고 진리로 이끌어주어야 합니다. 이런 마음을 이룰 때, 상대를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정한 지혜를 얻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관용으로부터 얻어지는 지혜입니다.

2. 양 순

양순은 선하고 아름다운 마음의 향이 말과 행함의 선한 열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음이 선과 진리로 가득하면, 단물만 내는 입술의 열매와 아름다운 행함의 열매가 나타납니다. 그런데 선하다 해서 마냥 착하고 부드럽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영적인 선과 진리로 가득 찬 마음에는 어둠을 물리치는 빛의 권세가 있기 때문입니다.
영계에서는 죄가 없는 것이 힘입니다. 심지어 어린 아이라 해도, 마음에 성결을 이룬 사람이 명할 때는 어둠이 물러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양순이 임하면, 영으로 분별하도록 이끌 수 있고 마음을 다스리게 도와줄 수도 있습니다. 주의 종이나 일꾼들이 상담해 줄 때도 양순의 열매가 맺히면 말의 권세가 달라집니다. 육신의 생각에 빠진 사람들에게도 명쾌하게 생각의 고리를 끊어줄 수 있는 것입니다.
1998년 당시, 교회 안에 비진리의 말을 퍼뜨려서 성도들을 미혹하려는 세력들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진리가 아니면 듣지도 보지도 말라 했고, 미혹하는 사람들에게는 진리로만 답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일꾼이나 주의 종 중에서도 순종하지 못한 분들이 있었습니다. 미혹하는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지 알아야 양떼가 미혹을 받지 않게 지킬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변론이 될 뿐이며, 오히려 비진리를 들으므로 자신이 스스로 시험에 들기도 했습니다. 상대의 생각에 맞춰서 설명해 준다 해도, 해결되는 것은 그 순간뿐입니다. 어차피 또 다른 질문이 꼬리를 물어 다른 의혹과 육신의 생각이 나옵니다. 하나를 설명해 주면 해결된 것 같다가도, 얼마 지나지 않아 비슷한 문제를 들고 와서 또 답을 얻기 원합니다. 애써 상담을 해주고 심방을 해도, 나중에 보면 또 똑같은 모습으로 돌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가 가득하여 영의 지혜가 있으면, 상대가 매여 있는 육신의 생각에 변론하며 끌려 다니지 않습니다. 몇 마디 대화 속에서도 금방 상대의 상태를 분별하여, 생각의 방향 자체를 육의 생각에서 영의 생각으로 바꿔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담을 받을 때, 양떼들은 시원함과 평안함을 얻고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을 얻게 됩니다. 더 깊은 차원의 양순은 다음 시간에 살펴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누가복음 12장에는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 형에게 부모의 유산을 공평히 나누도록 권면해 달라고 요청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때 예수님은 유산을 어떻게 분배했는지, 형이 얼마를 더 나눠줘야 하는지 등을 들어보고 잘잘못을 가려주고자 하시지 않았습니다. 15절에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하면서, 더 중요한 것을 알려주고자 하셨습니다. 탐심을 버리지 않는 한, 계속 형제 사이에 감정이 상할 일이 생기게 되고, 하나님께서 탐심을 버릴 때 물질의 축복을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진정 축복받을 수 있는 영적인 답을 주셨습니다. 큰 나무를 뽑으려면 가지를 자르는 것이 아니라, 근본 뿌리를 뽑아내야 합니다. 자신의 마음을 관용과 양순으로 비춰볼 때, 모든 문제의 근본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관용과 양순의 마음이 임할 때,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 나아가 다른 사람들의 문제까지 해결해 주며 평안과 위로를 줄 수 있습니다. 진리와 선이 가득하여 많은 사람을 생명으로 인도하는 위로부터 난 지혜를 소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랫글 : 위로부터 난 지혜(9)
윗글 : 위로부터 난 지혜(3)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