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트위터 페이스북 메일보내기 스크랩하기 바로가기복사 PDF
제목 요한일서 강해(22)
설교자 당회장 이재록 목사 설교본문 요일 3:4 날짜 2011.06.05
요한일서 강해 스물두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말씀을 증거합니다.

본문 요한일서 3장 4절에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 했지요.
이 말씀대로 죄를 짓고 불법을 행하면 반드시 공의에 따라 심판을 받습니다. 물론 죄를 지었어도 회개를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지요. 그런데 내 편에서는 “회개했다” 하지만 하나님 편에서 보실 때는 “회개가 되지 않았다” 하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회개는 말로만이 아니라 중심으로 하는 회개라야 합니다. 통회하는 심령으로 죄를 자복하고 이후로는 그 죄에서 완전히 떠나야 하지요. 열매를 보고 나무를 분별하는 것처럼 그 삶 속에 참된 회개의 열매가 맺혀야 중심으로 회개한 사람이라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범죄한 사람이 나름대로 회개를 했다 해도 그 회개가 온전한 열매로 맺히기까지는 연단이 계속 임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또 참된 회개를 하려면 하나님의 은혜로 회개의 영이 임해야 하는데 회개의 영이 임하지 않는 중한 죄들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아무리 회개하려 해도 중심의 회개가 되지 않으니 용서받을 수도 없고 재앙에서 벗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공의에 따라 심판이 임한다 해도 그 심판의 양상은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납니다. 어떤 사람은 죄를 지었을 때 즉각 징계가 임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아무 일 없는 것 같이 살다가 세월이 지난 후에 징계를 받습니다.

범죄한 당사자에게 재앙이 임하기도 하고 자녀나 후손 대에 가서 임하기도 하지요. 때로는 큰 죄를 짓고도 별다른 재앙이 없이 편안하게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도 결국은 더 큰 형벌, 곧 지옥의 형벌을 받지요.

사망에 이르기까지 징계도 받지 않으면 깨우쳐서 회개할 기회도 얻지 못하는 것이니 징계가 없는 것이 더 불쌍하고 비참합니다. 세상 사람의 경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는 주를 믿는다 하는데 하나님께서 외면하시므로 죄를 지어도 아무 징계가 없다면 얼마나 두려운 일입니까?

실제로 교회 안에서 그런 경우를 종종 봅니다. 심히 중한 죄를 범했고 중심의 회개도 하지 않았는데 큰 징계가 없는 것입니다. 제가 그동안 목회하면서 볼 때 그들과 비슷한 죄를 지은 몇몇 사람들은 중심의 회개를 하고도 이후로 큰 연단을 받았습니다. 중한 질병이나 재앙으로 고통 받으면서 철저히 회개도 했고 용서는 받았는데 그런데도 질병은 치료받지 못하여 결국 소천한 경우도 있었지요.

그런데 이렇게 죄를 짓고도 아무 징계가 없는 사람들이 있기에 저는 그 이유를 하나님께 여쭤보았습니다. 자신이나 조상 대에 어떤 큰 선을 쌓아서 특별히 긍휼을 입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왜 징계가 없는가? 그 이유가 궁금했지요. 그들이 징계 받고 고난 받기 원하는 마음으로 제가 궁금해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도 징계가 없으면 그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히브리서 12장 8절에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하셨지요. 만약 이 사람이 어떤 선한 행함이나 중심이 있어 긍휼을 입을 수 있었고 그래서 징계가 면해진 것이라면 다행이고 감사한 일이지요.

그러나 죄의 담이 헐어진 것도 아닌데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사생자와 같이 외면하시는 것이면 어찌하겠습니까? 그 당사자들보다 오히려 목자인 제가 더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었기에 그 이유를 알고자 한 것이지요. 만약 하나님께서 외면하신 상황이라면 그래도 어찌하든 회개케 해서 구원을 받게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에게 어떤 공의가 적용되는 것인지 알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 설명하시기를 그들이 어떤 선을 많이 쌓아서 징계가 없는 것이 아니라 하셨습니다. 조상이 선을 쌓은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 조상 대에도 많은 악을 쌓았기 때문에 타고난 중심도 선하지 않은 상황이었지요. 그런 사람들이 죄를 짓고 살아가는데도 징계가 없는 것은 어차피 징계를 해도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들이 큰 사고나 질병을 당해서 잘못을 진심으로 깨우칠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도 그런 은혜를 허락하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회개하여 돌이킬 마음조차 되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전에 이미 설명한 경우 중 수치심이나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에게 특별한 징계가 없는 것도 여기에 해당합니다.

지금부터 설명할 또 한 사람은 중한 육체의 일들을 범하고 나서 형식적인 회개는 했지요. 그 뒤로 교회도 잘 다니고 머리된 일꾼으로 사명감당도 합니다. 사고나 재앙, 질병이 없이 살면서 나름대로 사명 감당도 한다고 하지요.

그러나 제가 볼 때는 그 회개는 참회개가 아니었습니다. 철저히 마음을 찢는 통회자복도 아니었고, 그 이후의 삶을 보아도 죄에서 떠나 성결의 열매를 맺는다거나 긍휼을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진실하게 갚아나가는 삶이 아니었지요.

사실, 이 사람은 예전에도 죄를 범하여 죽음 직전에 이르렀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난 적이 있습니다. 죄를 회개하고 저에게 기도받았을 때 하나님께서 극적으로 살려도 주셨고요.

보통 하나님의 은혜로 죽음을 면한 사람들은 새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여 두고두고 그 은혜를 갚고자 합니다. “저는 아버지의 은혜로, 목자의 기도로 새로운 생명을 얻었습니다” 하면서 기회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간증하여 끊임없이 영광을 돌리곤 하지요.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살아난 날을 육의 생일보다 더 소중히 여기면서 해마다 저에게 찾아와 인사하기도 합니다. 사명 감당에도 열심을 내어 최선을 다해 충성하며 달려가고요.

그런데 그는 이런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두고두고 감사하는 고백을 하거나 성도들에게 늘 간증하여 영광을 돌리는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지요. 아버지의 권능에 대해, 목자의 권능에 대해 증거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기도해 준 저에게 감사하거나 진리로 변화되는 모습도 없었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열매 내려는 그런 모습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 일이 옛날에 있기는 했나?’ 싶을 정도로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렸지요. 오히려 더 큰 죄를 범해 놓고도 철저히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만 회개한 것처럼 행동합니다. 충성한다 하면서 직분을 맡아 영혼들에게 천국과 목자의 권능을 말하지만 진실한 마음에서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 시간에 늘 참석은 하지만 중심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위해 부르짖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의 눈에 보이기 위한 것뿐이지요. 그렇게 해야 자신이 누리는 것을 그대로 누리고 사람 앞에서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에 지식적으로 말하고 행하는 것뿐입니다.

결국 자기 위치와 체면을 지키기 위한 방편이요 수단이지요. 그러나 본인은 이런저런 핑계로 자신의 악한 모습을 정당화시키며 선으로 포장하고 있어서 스스로의 마음을 발견할 수가 없습니다. 충만한 표정으로 웃으면서 성도들 앞에서 외식하면서도 ‘내가 이렇게 잘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양심이 화인 맞은 것처럼 단단해지고 굳어져 왔기 때문에 어떤 병에 걸린들, 아니면 사고를 당한들 참된 회개가 나올 수 없는 상황입니다. 물론 몸에 고통이 오면 힘들고 두려워서 잠깐 회개할 수는 있지요. 그러나 철저히 돌이켜서 변화되는 참 회개를 할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제가 당사자를 직접 불러서 “하나님께서 이러이러하게 말씀하십니다. 구원받으려면 회개해야 합니다.” 하고 깨우쳐 준다면 어떨까요? 말씀을 들어서 진리를 알기 때문에 입으로는 “아멘” 할 것입니다. 심지어 “깨우쳤습니다. 돌이키겠습니다” 하면서 제 앞에서는 눈물도 흘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중심의 회개는 아니지요. 얼마 지나면 다시 은혜 없는 무감각한 마음으로 돌아가 자기 유익을 구하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만약 그에게 질병이나 사고로 징계가 오면 오히려 저만 힘들어질 것입니다.

저에게 와서 기도를 받으려 하면 제 마음에는 어찌하든 그를 살리기 위해 또 얼마나 애통해야 하겠습니까? 머리된 일꾼이 그런 상황에 처하면 성도들에게도 덕이 되지 않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그저 지켜보고 계시는 상황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를 끝까지 품으셨고 한 번이라도 더 기회를 주려고 하셨습니다. 의심 많은 도마라 할지라도 어찌하든 믿을 수 있도록 증거를 보여 주셨지요.

도마처럼 변화되어 순교하는 사람도 있고, 유다처럼 끝내 사망으로 가는 사람도 있지만 어떤 사람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는 긍휼 가운데 오래 참으십니다.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시지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고 계시는데도 이 사람은 상황이 점점 더 나빠지고 있습니다. 날이 갈수록 그 눈빛이 점점 더 육으로만 빠져드는 것을 볼 때 제가 얼마나 안타까운지요.

그나마 그가 긍휼히 여김 받는 한 가지 이유는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제단 안에 머물러 있으려는 마음이 있다 했습니다. 그것이 이 제단에서 나타나는 어떤 은혜를 사모한다거나 어찌하든 변화되려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 안에서 자신이 누리는 것을 그대로 누리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고 또 ‘이 은혜의 테두리 안에서 벗어나면 어떤 해를 입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양심이 무감각해지고 죄가 죄인 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이 이 한 사람뿐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너무나 많고, 교회 안에도 그런 사람들이 적지 않지요. 그나마 그들이 교회를 떠나지 않고 은혜의 테두리 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한 번의 기회라도 더 주십니다. 그러나 아무리 기회를 주신다 해도 결국 선택은 각자의 몫입니다.

예전에 몇몇 머리된 주의 종과 일꾼들에 대해 그들은 지옥에 가게 된다고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 저는 수개월을 애통하며 하나님께 매달렸고 하나님께서도 그들에게 다시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로 인해 많은 수가 회개했고 믿음의 고백, 감사의 고백을 했지요. “저도 이제 새 예루살렘 소망이 넘칩니다. 충만하게 잘 달려갑니다. 너무나 목자께 감사해서 목자를 위해 눈물로 기도하고 금식합니다” 이런 고백들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후에 보니 그 중에 또 많은 수가 수시로 변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마음 중심을 변화시키지 않으니 시간이 지나면 은혜가 사라지기도 하고 자기 유익에 맞지 않으면 마음이 변질되는 것이지요. 아무리 제가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고 아무리 그들을 깨우쳐 주며 책망한다 해도 자기 스스로 마음을 변화시키지 않으니 다시 사망의 길로 가더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회개할 마음 자체가 없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징계 없이 두셨다 해서 그들이 마냥 그대로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시간이 지나고 죄의 담이 더 많이 쌓이면 어떤 형태로든 드러나게 됩니다. 완전히 외면당하여 사단이 사로잡아 버릴 수도 있고, 그 밖에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상황에 빠지게 될 수도 있지요.

사울 왕을 보면 하나님을 계속 대적하다가 결국 악신이 들려 심히 번뇌했다 했습니다. 이럴 때 하나님을 사랑하는 다윗이 수금을 타면 사울에게서 악신이 떠나가고 상쾌함을 얻곤 했지요.

그러나 나중에는 다윗이 수금을 타고 있어도 악신이 사울을 힘 있게 사로잡아서 “야료했다” 곧 까닭 없이 트집을 잡고 함부로 떠들어 대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악을 발하며 다윗을 죽이려고 창을 던지기까지 하고요. 사울 자신이 회개하지 않고 점점 어둠에 사로잡히는 정도가 심해지니 영적인 권세 있는 찬양을 들어도 소용이 없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예수님을 판 가룟 유다도 어둠에 사로잡혀 마음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므로 결국 자살하기에 이르렀고요. 혹 끝까지 별 재앙 없이 무사히 지낸다 해도 결국 심판의 날을 맞게 되는데 그때는 회개할 기회가 없습니다.

그러니 아직 기회가 있을 때 재앙을 당해서라도 회개할 수 있다면 당연히 그것이 더 감사한 일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깨우칠 수 없고 회개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무뎌진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긍휼을 거두어 버리시면 즉시 심판이 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전에 한 청년이 심히 죄를 범하여 결국 사고로 목숨을 잃은 적이 있습니다. 진리를 알면서도 악을 계속 쌓았기에 더 이상 기회를 준다 해도 회개할 수 있는 마음이 아니었지요. 이 청년도 앞에서 설명한 사람들처럼 이 제단에서 떠난 것은 아니었기에 하나님께서도 특별히 연단 없이 그를 내버려 두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를 죽음에 내어 주신 것은 그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라도 회개의 기회가 임하도록 은혜를 주신 것입니다. 죄로 인해 멸망으로 가는 샘플을 볼 때 그와 함께 육을 취하고 범죄하던 사람들이 크게 경각심을 가질 수가 있었지요.

또 그 청년의 가족은 기도하고 충성하며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가족이었습니다. 그 부모가 비록 육의 아들을 잃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은혜를 주셔서 믿음을 지킬 수 있게 해 주셨지요.

부모들도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하고 영적으로 변화될 수 있는 여러 가지 깨우침을 얻을 수 있었고요. 또 범죄하던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을 보고 죄의 잠에서 깨어났기에 이런 아픔들을 믿음으로 잘 이겨낸 자체가 부모에게는 상급이 될 수 있는 것이지요.

부모님들이 열심히 충성하고 기도를 쌓으면 그 자녀에게 은혜가 더해지고 죄 가운데 빠진 자녀라 해도 회개의 기회가 더 주어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자녀가 변화될 중심이 아닐 때는 부모의 믿음으로 자녀가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 차례 강조하지만 구원과 응답, 축복과 저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선택이라는 사실입니다. ‘나는 양심에 화인 맞았다 할 정도로 악한 마음이 아니니까 괜찮다’ 하고 이런 말씀을 흘러 버리시면 안 됩니다.

자신의 모습 속에서 죄나 악이 발견되면 얼마나 마음 깊이 애통하십니까? ‘애통한다’ 하고 말로만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회개의 열매를 맺는지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버지 하나님, 죄송합니다, 오늘 누구누구를 대할 때 제가 상대에게 찌르는 말을 하고 무례하게 대했습니다. 제 안에 이렇게 교만하고 상대를 무시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용서하시고 변화될 수 있는 능력 주옵소서” ‘이렇게 회개도 했고 변화되려고 기도를 잘하고 있으니 이제 됐다. 괜찮다’ 할 것이 아닙니다.

중심으로 회개하고 간절히 기도했으면 실제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후로는 동일한 모습이 나오지 말아야지요. 1년이 지나고 2년이 지나고 더 오랜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동일한 악이 나온다면, 그래서 여전히 회개하는 기도를 하고 있다면 얼마나 미련하고 답답한 일입니까?

이런 사람은 믿음의 진보가 없이 신앙이 정체되므로 은혜가 떨어집니다. 성령의 충만함도 식어지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의와 틀이 강해지고 교만이 자리 잡기도 하지요. 영적인 잠에 빠져 미혹을 받아도 분별하지 못하여 쉽게 큰 죄를 범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정체에 빠지지 않으려면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아니라 내 마음과 중심이 날마다 새롭게 변화되어야 하지요. 발견하고 회개하고, 발견하고 회개하고 이렇게 반복만 하고 있지 말고 한 번 발견하여 회개했으면 신속하게 죄의 뿌리까지 뽑아 버려야 합니다.

작은 죄라 해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흠 없는 주님의 신부가 되기 위해 속히 다 벗어 버려야 합니다. 이렇게 날마다 새롭고 또 새로운 우리 성도님들이 다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아랫글 : 요한일서 강해(45)
윗글 : 요한일서 강해(21)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