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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한일서 강해(27)
설교자 당회장 이재록 목사 설교본문 요일 3:12 날짜 2011.11.06
오늘은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가인과 그 아우 아벨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가인과 아벨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여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이 땅에서 낳은 아들들입니다. 형 가인은 농 사를 업으로 삼았고 아우 아벨은 양치는 일을 업으로 삼았지요.

1. 가인과 아벨의 제사

첫 사람 아담은 이 땅으로 쫓겨나면서 에덴동산에서 누리던 권세와 영광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에덴동산에서처럼 영화롭게 살 수는 없었지요. 그러나 그는 범죄하기 전에 만물에 대한 지식을 하나님께 배웠고 첫째 하늘을 다스린 경험도 있었습니다. 그 지식을 활용하여 이 땅에서 살아가며 자녀들에게도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가인은 농사하는 법을 알았고 아벨은 양치는 법을 안 것입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아들들 가운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데서 문제가 발단되었지요.

창세기 4장 3~5절에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가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했습니다. 분하여 혈기를 내면 안색이 변하는 것을 봅니다. 심하면 창백하다 못해 검푸른 색깔을 띠기도 하지요.



영계의 법에 의하면 죄인들은 빛이신 하나님과 교통할 수가 없습니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로는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게 되었지만 처음부터 완전히 끊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류가 죄로 물들어감에 따라 점점 더 교통하지 못하게 되고 결국 완전히 단절되기에 이르렀지요. 처음에는 조금씩 교통의 문이 열려 있었습니다. 이후로 점점 죄를 받아들이고 악해지니 완전히 하나님과 단절이 돼 버린 것이지요.

이처럼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지면 다시 회복하는 길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은 곧 죄와 악을 버리고 선을 이루는 것이지요. 선으로 들어가는 만큼 하나님과 교통이 이루어지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완전하지 않다 해도 믿음의 4단계에 들어왔다면 그때부터 하나님과 교통이 이루어지고, 믿음의 5단계인 온 영으로 들어왔다면 하나님과 완전한 교통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로 인해 교통이 단절되기 전에 아담에게 제사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제사를 통해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교통할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구약 시대의 제사법은 오늘날로 말하면 영적인 예배를 일컫습니다. 하나님 앞에 영적인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할지 저는 늘 알려드리고 있지요. 즉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는, 최소한 예배드리기 10분 전에 미리 와서 묵상 기도함으로 마음을 정리하여 예배를 준비합니다. 또 축도나 주기도문으로 마칠 때까지 자리를 이동하지 않고 드려야 합니다. 간혹 축도도 마치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라 할 수 없습니다.



2. 피의 제사를 원하시는 하나님

레위기를 보면 여러 가지 제사가 있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속죄의 제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제사를 통해 죄 사함 받는 방법에 대해 자세히 가르쳐 주셨고, 아담은 자녀들에게 그 내용을 전해 주었습니다. 따라서 가인과 아벨도 어떻게 하나님 앞에 제사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지요. 그런데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변질시켜 버린 것입니다. 제사법은 하나하나 영계의 법칙에 따라 규정되어 있습니다. 아무렇게나 제사를 드린다 해서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이 아니지요.

특히 속죄의 제사를 드릴 때는 반드시 “피의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히브리서 9장 22절에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했지요. 또 레위기 17장 11절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했습니다. 속죄의 제사를 드릴 때는 반드시 피의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피의 제사만이 죄를 속할 수 있으므로 피의 제사를 드리라고 가르쳤지요. 그런데도 가인은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을 무시했고 하나님 말씀조차 무시했던 것이지요.



죄의 삯은 사망이므로 죄를 지은 사람은 반드시 생명으로 죗값을 치러야 합니다. 이 죄를 대속하는 것이 곧 피 흘림인 것이지요. 피도 다 같은 피가 아닙니다. 죄가 없는 피, 원죄, 자범죄가 없는 참 성결의 고운 피, 보혈의 피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4천 년 후에 되어질 일을 미리부터 제사법으로 가르치고, 그렇게 지내오게 하신 것이지요. 이는 앞으로 구세주가 나타날 것을 알려 주고, 그분의 피 흘림으로 죄 사함 받아서 구원받아 천국에 간다는 것입니다.

제물을 드려 죄를 대속할 때도 그 제물의 생명을 의미하는 “피”를 드려야 죄의 값을 치를 수 있지요. 아담이 범죄하여 쫓겨날 때도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입혀 주신 옷은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옷이었습니다. 여기에도 이미 이런 속죄의 영적인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아담은 이 영적인 법칙과 제사의 방법을 하나님께로부터 배웠고 자녀들에게도 분명히 가르쳤습니다.

이에 아벨은 가르침대로 변함없이 순종했지만 가인은 그러지 못했지요. 자기 생각대로 예물을 변질시켜 땅의 소산으로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는 자기 보기에 좋은 방법을 좇아 드린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피의 제사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짐승을 잡아 제사를 드리지 않고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립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마음과 뜻과 힘과 정성을 다해 예배드리는 것이 영적으로 피의 제사를 드리는 방법이지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리스도인으로서 합당한 의와 사랑을 이루게 되어 있지요.

반면, 예배를 정성 다해 드리지 않고 형식적으로 시간만 때우는 사람은 가인의 제사, 즉 육의 제사를 드리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예배하는 사람이라면 일상생활도 세상 사람과 다름없이 불경건하게 살아가게 마련이지요. 말로는 주를 믿는다 하지만 막상 그 삶 속에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영적인 증거가 없습니다.



3. 가인같이 하지 말라

종종 가인과 아벨의 이 사건에 대해 하나님을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가인은 농사짓는 사람이니까 농산물로 드렸고 아벨은 양치는 사람이니까 양을 드렸는데 가인이 뭘 잘못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법칙을 몰라서 자기에게 있는 좋은 것을 드렸는데 하나님께서 아벨만 편애하셨기에 가인이 감정을 품었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이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 제사법을 알려 주지 않으셨다면 아벨도 피의 제사를 드리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여러분이 거룩하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면 짐승을 죽여서 제물로 드리고 싶겠습니까? 아니면 향기로운 과일과 곡물들을 드리고 싶겠습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하나님 앞에서 잔인하게 짐승을 죽이고 피를 흘려서 드리기는 꺼림칙하겠지요.

더구나 이 당시는 아직 세상에 악이 덜한 때였기에 짐승을 쉽게 죽이거나 잡아먹을 때도 아니었습니다. 짐승을 잡아 고기를 먹은 시기는 이때로부터 한참 지나 노아의 홍수가 있고 나서였지요. 그러니 하나님께서 영적인 제사의 방법을 알려 주시지 않았다면 아벨도 짐승을 잡아 드릴 생각을 하기가 쉽지 않았을 상황이라는 말입니다.

히브리서 11장 4절에도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했지요.

아벨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믿음으로 순종하여 피의 제사를 드리니 이 행함이 아벨에게 의가 되었습니다.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께 기쁨을 드릴 수 있었지요. 똑같이 가르침을 받고도 가인은 자기 생각 속에서 땅의 소산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이런 육의 제사로는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입을 수 없습니다. 또한 그러한 제사가 하나님께 열납될 수도 없지요.



그러면, 가인은 어떻게 했을까요? “아차, 내가 부모님의 말씀을 명심하지 못하고 변질시킨 것이 잘못이었구나. 지금이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려야겠다.” 이렇게 돌이켰을까요? 아닙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께 불편한 마음이 들고 기분이 상했습니다. 그 감정을 풀 데가 없으니 애매한 동생 아벨에게 화살을 돌려 시기 질투를 품었지요.

오늘날도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경에 분명 하나님의 뜻이 잘 나타나 있는데도 그대로 행하지 않고 자기 생각에 맞춰 변질시킵니다. 오히려 성경대로 신앙생활 하는 이들을 판단 정죄하며, 하나님께 사랑받는 이들을 보면 시기 질투하지요.

예를 들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서 죄악을 벗어버리고 불같이 기도하는 사람은 영적인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 속에 하나님과 교통할 수도 있고 기사와 표적을 나타낼 수도 있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말로는 하나님을 믿노라 하지만 성경에 분명히 기록된 이런 일들을 보면 이상하다, 잘못되었다고 비방합니다. 이런 사람에 대해 디모데후서 3장 5절에는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말씀합니다. 사람의 생각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변질시키면 겉으로 아무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 해도 하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할 때라야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할 수 있지요. ‘나는 성령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영안이 열리지 않았는데.’ 또 ‘나는 치료의 역사를 체험하지 못했는데 왜 저들만 그런 역사를 체험하나? 저들이 뭔가 잘못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일이 아닙니다. ‘나는 믿는다 하면서도 무엇이 부족하여 하나님과 교통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지 못하는가?’ 이렇게 겸비한 마음으로 자기를 돌아보고 변화되어야 마땅하지요. 다음 시간에 이어 증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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