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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한일서 강해(42)
설교자 당회장 이재록 목사 설교본문 요일 4:11-16 날짜 2014.06.1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 11절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알려 주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하나님의 자녀들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라 해도 선한 일을 볼 때 감동을 받습니다. 또 어려운 상황에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았다면 ‘나도 다른 누군가의 힘이 되고 싶다’는 소망을 품게 되지요.

예를 들어 어릴 때 극심한 가난 속에서도 남의 도움으로 공부하여 성공하게 되면 어릴 때 자신을 도와준 분을 기리면서 장학재단을 설립하는 경우도 봅니다. 직접적으로 나를 도와준 분에게 보답하는 것만이 아니라 예전의 자신처럼 어려운 처지의 학생들에게 힘이 되려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은 이런 선행들과는 비교할 수가 없는 크나큰 사랑입니다. 밤낮 울어도 눈물로 갚을 수가 없고 어떤 말로도, 어떤 예물로도 다 갚을 수가 없는 사랑이지요. 이런 사랑을 받은 우리는 어찌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할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을 사랑하되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라는 증거가 됩니다.

반대로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도 다른 사람에게는 사랑을 베풀지 못한다면, 자신도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누릴 수가 없게 되지요. 성경에 보면 큰 은혜를 받고도 남에게는 악으로 갚은 사람의 예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일만 달란트의 빚을 졌습니다. 1 달란트는 노동자의 하루 품삯을 6천 일 동안 곧 16년이 넘게 모아야 하는 액수입니다. 1만 달란트는 거기에 1만 배를 곱해야 하니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해서 16만 년이 넘게 모아야 합니다. 얼마나 큰 액수인지 실감조차 하기 어렵지요. 이 큰 빚을 갚지 못하여 가족들까지 종으로 팔려가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주인이 긍휼을 베풀어 모든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얼마나 감격하고 감사했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탕감받은 사람이 기뻐하며 돌아가다가 자신에게 일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만났습니다. 일백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100일치 품삯이니 그 금액만 따지자면 적은 액수는 아니지요. 그러나 자신이 탕감받은 빚에 비하면 지극히 적은 액수입니다. 자기가 받은 엄청난 은혜를 생각하면 남에게도 은혜를 베푸는 것이 마땅하지요. 그런데도 이 사람은 긍휼을 베풀지 않고 자신에게 빚을 갚을 때까지 동료를 잡아 가두게 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주인은 진노하여 그에게 탕감해 준 것을 무효로 하고 빚을 다 갚기까지 옥에 가두라고 명했지요. 이 사람은 자신이 은혜를 입었을 때는 주인의 은혜에 감사한다 했지만 마음으로 그 사랑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남에게는 사랑을 베풀지 못했고, 결국 자신이 받은 은혜조차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이어지는 12절에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 했지요.

앞절에서도 설명한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진정 깨닫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할 뿐 아니라 형제에게도 자신이 받은 그대로 사랑을 베풀어 줍니다. 이렇게 진실한 사랑을 베풀어 나가다 보면 독생자의 생명까지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 안에도 온전히 열매로 맺히게 되지요.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을 닮아 성결된 참 자녀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요일 5:3 전반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한 대로 모든 계명의 근본 정신은 결국 사랑입니다. 예를 들어 십계명 중에 우상숭배 하지 말라거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하신 계명도 우리를 힘들게 하려고 주신 계명이 아닙니다.

또 이웃에 대한 계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악을 행하려는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살인, 미움, 시기질투, 판단 정죄, 도적질, 이런 죄악들을 행하고 싶지 않지요. 그러니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계명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쉽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긍휼도, 은혜도, 사랑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내 죄를 용서받은 은혜가 얼마나 큰지 알면 나도 남의 허물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내가 받은 사랑이 얼마나 큰지 알면 나도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 되지요.

여러분의 마음에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이 절절히 새겨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을 첫째로 사랑하며,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진정 내 아들이다. 내 사랑하는 딸이다 인정해 주시고 은혜와 감동 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체험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 넘치는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여러분 안에도 온전한 사랑을 이루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 13절에 보면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곧 하나님)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심을 증거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시지요. 롬 8:16에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신다 했지요. 여러분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 그분이 내 아버지라고 고백합니다. 2천여 년 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본 적도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구세주라고 중심에서 고백할 수 있지요.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이런 고백을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하나님과 주님을 증거해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믿을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때 곧 계명을 지키며 형제를 사랑할 때 우리 안에는 평안과 기쁨이 임합니다. 곧 성령의 충만함을 느끼게 되지요. 이 성령의 충만함이 바로 ‘내가 하나님 안에 거하는구나’ 하는 증거가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원래 한 분이셨지만 인간 경작을 위해 삼위일체로 분리하셨습니다. 경작의 과정 가운데 성자와 성령께서 각각 담당해 주셔야 하는 분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죄에 물든 인류를 대속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구세주가 되어 주셔야 했지요.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셔야만 거룩하신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임하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임하셔야 예수 그리스도가 참으로 나의 구세주이심과 하나님이 내 아버지이심을 믿을 수 있지요.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고 영의 세계를 믿을 수 있게 하십니다. 죄가 무엇인지, 의가 무엇인지 분별하는 것도, 행한 대로 심판을 받게 될 것을 깨우쳐 주심도 그래서 우리가 말씀대로 살 수 있게 능력을 주시는 것도 다 성령의 역사입니다. 진리를 지식적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각자에게 적용할 수 있게 하는 것, 마음이 변화되도록 도와주는 것도 성령의 역사이지요.

쉬운 예를 들어 세상 사람들의 대화에는 비진리의 대화가 참으로 많습니다. 욕이나 비속어가 수시로 튀어 나오고 음란한 내용이나 자기 자랑 등도 많지요. 남의 허물을 전하고, 판단 정죄하며 상대의 외모나 행동을 비방하거나 무시하는 말도 예사로 나옵니다. 그러나 성령 받지 않은 육의 사람들은 자신이 비진리의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깨닫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고 나면 달라집니다. 악한 말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깨우치므로 먼저 언어 습관을 바꾸게 되지요. 욕하던 사람이 욕을 하지 않습니다. 판단 정죄하는 말, 남을 깎아 내리는 말, 수군수군하는 말, 거짓말 등도 버리고 입술에서만 아니라 마음에서도 그런 비진리를 벗어 나가지요.

혹여 아직은 세상 때를 다 벗지 못해 비진리의 말을 낼 때도 있습니다. 이럴 때는 곧 성령이 탄식하는 것을 느낍니다. 마음이 무겁고 곤고하지요. ‘아까 그런 말을 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앞으로는 내가 더 근신해야지, 입술을 거룩하게 지켜야지’ 이렇게 다시 결단하고 기도함으로 점점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범사에 자기 유익을 구하지 말고 상대의 유익을 구하라” 거나 “원수를 사랑하라”는 등의 진리를 들어도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이런 진리를 행하기가 어렵습니다. 원수를 보면 미운 것이 당연한 것 같고, 상대의 유익을 구하려면 손해를 보는 것 같아서 힘이 들지요.

그러나 성령은 끊임없이 깨우쳐 주십니다. “아들아, 딸아, 방금 네가 한 그런 행동은 자기 유익을 구한 것이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이 아니다. 상대의 유익을 구해라. 희생하라. 양보하라. 낮아지라. 겸비하라.” 이렇게 주관해 가시지요.

이렇게 성령께서 이끄시는 대로 진리 가운데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자녀다운 모습으로, 영으로 온 영으로 열매를 맺게 되지요. 이처럼 범사에 성령의 인도하심을 좇아 진리 가운데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께서 여러분 안에 거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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