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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요한일서 강해(45)
설교자 당회장 이재록 목사 설교본문 요일 4:19~20 날짜 2014.08.1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한일서 강해 마흔다섯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 요일 4:18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참된 사랑을 이룬 사람은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상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습니다. 또한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사랑을 줄 수 있지요. 또한 이러한 사랑이 어떤 상황에서도 변질되지 않습니다.

이처럼 참된 사랑을 이루면 마음에 두려움이 없습니다. 자기 유익을 좇지 않고 항상 선과 진리를 좇아 행하기 때문에 범사에 담대하지요. 스스로가 악으로 심은 것이 없기에 ‘혹시 내가 재앙을 당하지나 않을까’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실제로 현실적으로 어떤 위기가 닥쳐도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과 선의 마음을 다 보고 계시므로 결국 축복의 길로 인도하시지요.

반대로 영적인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자기 유익을 구하여 계명을 어기는 사람은 뭔가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지 막연한 불안감이 항상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 28:1에도 “악인은 쫓아 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 했지요.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계명을 온전히 지키는 성도들은 이 땅에서도 재앙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에 대해서도 두려움이 없지요.

그런데 이 말씀은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도 어느 정도 적용이 됩니다. 복음이 전파되지 않았던 시대에도 의롭고 진실하여 자기 양심에 부끄러움 없이 살았던 사람들은 의연하고 담대했다는 기록이 전해지지요. 귀신이 나온다는 장소를 지나게 될 때도 두려워 떨지 않고 대범하게 행동할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위협을 받아도 구차하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뜻에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반면에 악을 많이 행한 사람들은 그만큼 두려움도 많습니다. 자기가 권세를 잡기 위해 궤계를 쓰고 악을 많이 행했다면 자신도 보복당할 것을 염려하며, 자기 자리를 넘보는 사람이 없을까, 암살당하지 않을까 항상 전전긍긍하지요. 삼국지의 조조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귀신을 두려워하고, 죽음을 두려워하며, 심지어 가까운 사람들조차 믿지 못하여 배반당할까 하여 늘 두려워합니다.

결론적으로 두려움이 임한다는 것은 외부적으로 두려울 만한 상황에서 비롯된 것만이 아니라 결국 자기 안의 어둠에서 비롯되더라는 사실입니다.

진리 안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진리 안에 온전히 거하는 사람, 중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움이 없지요.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는 말씀대로 염려 근심거리가 생길 때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지하므로 깊은 마음의 평안을 잃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신 후 제자들은 어떠했습니까? 끓는 기름 가마를 앞에 둔 사도 요한도, 십자가를 앞에 둔 베드로도 자신이 겪을 고난을 무서워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내 편이시므로 어떤 고난이 온다 해도 피할 길을 주시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줄 믿었습니다. 더 나아가 피할 길을 얻지 못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고난을 당할지라도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그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었지요.

그러나 나름대로 믿음이 있다 해도 온전한 사랑을 이루지 못하면 어떠합니까? 주님을 위해 순교하라는 것도 아닌데, 십자가에 달리는 것도 아니고 맹수에게 찢겨 죽어야 할 상황에 처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작은 연단이라도 오면 무슨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힘들어 하지요. ‘이것을 어떻게 극복할지’ ‘앞으로 더 큰 어려움이 다가오지는 않을지’ 불안하고 염려 근심하지요. 하나님께 기도하고 간구하면서도 응답을 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 마음에 담대함이 없어서 안절부절못하고요.

그만큼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믿어드리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 자녀는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하며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자녀입니다. 그 온전한 사랑과 신뢰가 있을 때라야 온전한 평강을 누릴 수가 있지요.

욥기에 나오는 욥도 연단을 받은 후에는 이런 평강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연단을 받기 전에도 욥은 나름대로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살았지요. 그러니 그가 행하는 만큼은 축복을 받으면서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그 마음에 온전한 사랑이 없으니 참된 평강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기쁨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근신하는 삶을 살았지요.

그러다가 사단의 송사가 허락되어 재앙을 당하게 되자 “나의 두려워하던 그것이 임했다” 합니다. 이전에 평안할 때도 이런 재앙이 임할까봐 겁내면서 살았다는 말이지요.

성도 여러분, 아무리 착한 자녀라 해도 부모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부모에게 매를 맞을까봐 겁내기만 한다면 그 자녀는 부모의 기쁨이 될 수가 없습니다. 자녀도 불행한 것이고요.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욥이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주셨습니다.

곧 연단을 통해 그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근본의 악을 벗어 버리며 사랑의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하게 하셨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고 하나님을 중심에서 사랑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 사랑 안에서 욥은 비로소 참된 평강과 행복을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서 한 가지 더 기억하실 것이 있습니다. 진리가 온전히 임하면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면 아직 성결을 이루지 못하여 영의 사람, 온 영의 사람이 아니라면 항상 욥처럼 두려움 속에 살아야 할까요? 아니지요. 여러분이 영의 흐름을 잘 타면서 최선을 다해 죄악을 버려나가고 있다면 나름대로 그 믿음의 분량 안에서 평안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때로는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연단이 올 수도 있고, 어떤 행위적인 죄를 범하지 않았다 해도 욥처럼 근본의 악을 발견케 하는 연단이 올 수도 있지요. 그러나 이럴 때도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자기 잘못으로 인해 시험이 왔을지라도 곧장 자신을 돌아보고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피할 길을 주시지요. 이렇게 돌이키면 피할 길을 주시니 그것도 감사의 조건입니다.

또 연단으로 인해 잠시 어려움을 겪었다 해도 그로 인해 깨우치고 변화된 만큼 믿음이 성장할 수 있으니 그 또한 감사의 조건입니다. 또한 근본의 악으로 인해 연단을 받는다면 아버지 뜻을 마음으로 깨우칠 때 영의 깊은 세계로 들어갈 수 있으니 이것도 감사한 일이지요.

이런 경우든 저런 경우든 자녀로서 아버지를 신뢰한다면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두려워하면서 신앙생활 할 이유가 없다는 말입니다. 마음의 할례에 관심이 없이 죄악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면 말이지요. 자신의 믿음의 분량 안에서 최선을 다해 변화되어 나가고 있는 사람이라면 사랑의 하나님을 믿어드리면 됩니다.

롬 8:28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셨지요. 이 말씀처럼, 사랑하는 자녀들의 삶을 지키시고 모든 것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아버지를 신뢰함으로 항상 기쁨과 평안 중에 거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결국은 온전한 사랑을 이루어 하나님 앞에 담대한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 요한은 계속해서 영적인 사랑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온전히 이루면 두려움이 없고 심판날에도 담대할 수 있다 했지요.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또 주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본문 19절에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했지요.
사람들은 원래 자기를 사랑해 주는 사람을 사랑하기 마련입니다. 나에게 잘해 주고 칭찬해 주며 존중해 주는 사람을 보면 나도 선하게 대할 수 있지요. 반대로 나를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 내 허물을 드러내고 지적하는 사람, 이런 상대를 사랑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세상 말에는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곱다 하지요. 악을 악으로 갚기 마련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선으로 악을 갚으라 하십니다. 나를 사랑하고 잘해주는 사람만 아니라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 나와 도저히 맞지 않는 사람도 사랑하라 하시지요.

마 5:46-47에도 말씀하기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하셨지요. 자기를 사랑해 주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도 세리와 같은 죄인들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원수까지라도 사랑하는 영적인 마음을 이뤄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는 우리가 먼저 그런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도 십자가에 달리신 것도 우리를 위한 사랑이셨습니다.

죄에 물든 인생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질병과 연약함을 고쳐주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선한 것만 주셨지만 인생들은 오히려 예수님을 미워했고, 배척했으며 결국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기까지 했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면서도 더 큰 사랑을 베풀어 주십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고 오히려 죄인들을 위해 기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권능이 있으니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십자가에서 내려오실 수 있었습니다. 천군 천사들을 불러 예수님을 못 박은 죄인들을 순간에 멸하실 수도 있었고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지 않으셨지요. 모든 조롱과 멸시를 참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만이 죄인들을 살릴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도 죄인들을 위해 귀한 독생자를 내어주셨고 그 후로도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성령을 보내어 우리의 삶을 인도하셨지요.
더구나 여러분은 참된 목자와 귀한 제단을 만나 스스로는 도저히 갈 수 없는 축복의 길로 인도받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조건 없이 주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사랑받을 만한 이유가 있어서 이 사랑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의 은혜이지요. 이런 사랑을 먼저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큰 사랑을 받은 자로서 양심이 있다면 감히 다른 누군가를 미워할 수는 없지요. 자기가 수천억의 빚을 탕감 받았다면 자신에게 겨우 몇 만 원의 빚을 진 사람에게 돈을 갚으라고 억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20절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없느니라” 했습니다. 다음 시간에 이어서 증거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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