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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모든 것을 다 내어 줄지라도
설교자 강사 이재록 목사 설교본문 고전13:1-13 날짜 2005.04.10
오늘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신 주님과 같이 온전한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증거하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히 진실한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는 참자녀를 얻고자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영접하고 성령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날로 영적인 성장을 이루어 온전한 사랑을 소유하기를 원하십니다. 사랑으로 율법을 완성하신 주님을 닮아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새예루살렘에서 영원한 사랑을 주고받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보면 영적인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 주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영적인 사랑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천국을 소유하려면 믿음, 소망, 사랑이 항상 있어야 하지만 사랑은 천국에 가서도 항상 필요한 것이기에 제일은 사랑이라고 말씀하시며 모든 것을 내어 주는 온전한 사랑이 임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온전한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모든 것을 내어 주신 주님의 온전한 사랑



요한일서 4:9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참자녀를 얻기 위해 독생자도 아끼지 않으시고 예수님을 내어 주셨으며, 예수님께서도 자신의 생명을 우리에게 내어 주셨지요.

우리들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채찍에 맞으시고 가시관을 쓰시며 손과 발에 못박히심으로 많은 피를 흘리셨습니다. 죄인들이 받아야 할 저주를 대신 받기 위해 나무에 달리시기까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 주는 온전한 사랑을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마음을 잘 알았던 모세나 사도 바울과 같은 믿음의 선진들도 영혼 구원을 위해 어떤 주저함도 없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 주었습니다.

요한일서 4:11에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했고, 요한일서 3:16에도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말씀하셨듯이 주님을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주님을 위해 그리고 형제, 자매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줄지라도 온전한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갖추어야 할 몇 가지 사항이 있습니다.

2. 모든 것을 내어 주는 온전한 사랑을 이루려면



1) 자기 자신이 갖고자 하는 마음이 없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사랑하기에 자신의 많은 것을 드리고 헌신한다 해도 마음 한편에는 그것에 대한 어떤 대가를 바라는 마음이 남아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내어줄지라도 마음에 오직 기쁨과 감사와 선한 감동만이 되어진다면 참으로 행복할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모든 것을 다 내어주었는데 왜 내게 얻어지는 것은 없는가?’ 하는 생각과 받고 싶은 마음이 들게 되면 자신도 힘들어지지요. ‘내가 영혼들에게 이만큼 사랑을 베풀었으니 나도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 ‘내가 주님을 사랑하여 이만큼 충성했으니 나도 인정받고 칭찬받고 싶다’는 마음 등이 없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머리된 일꾼이 되어질수록 섬김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있지 않은가 살펴보아야 하지요. 보통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기에 마음의 할례를 하고 주님의 나라를 위해, 영혼들을 위해 자신을 헌신한 사람들이 성도들의 인정을 받아 일꾼이 됩니다. 이처럼 자신의 많은 것을 내어주는 헌신을 통해 더 큰 사명을 얻게 되었는데 그 직분을 통해 얻어진 명예로 인해 도리어 섬김받고자 하는 마음이 있다면 이는 온전한 사랑이 맺히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주 안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명예로 인해 섬김받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거나 자기 자신이 갖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렇게 되어지지 않았을 때 서운함이 생기지요. ‘내가 머리이고 저는 아랫사람인데 내게 왜 이같이 해 주지 않는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여기서부터 불화가 생기기도 하고 화평이 깨어지는 일들이 발생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기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줄 수 있는 마음이라면 자신이 갖고 있는 명예도, 자랑도, 교만도, 자기 의로움도, 자존심도 철저히 다 내어버릴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직분의 높고 낮음을 따지기 전에 영의 질서, 교회의 질서를 따라 순종하며 서로 서로 섬길 수 있는 모습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시는데도 사람들은 알아주기는커녕 오히려 핍박하고 조롱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들을 위해 내 목숨을 버리는데, 왜 이같이 나를 핍박하며 조롱하느냐?” 말씀하지 않으셨지요. 다만 사람들의 완악한 모습에 애통하시며 그들을 위한 중보기도를 올리셨던 것입니다(눅 23:34).

저 또한 저의 모든 것을 다 내어 주기까지 많은 사랑을 주었던 이들로부터 오히려 어려움을 당할 때 어떠한 악으로도 대항치 않았습니다. 저를 찌르고 비방했지만 그들을 미워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이 사망의 길로 가는 것을 심히 애통하며 구원해 주시도록 하나님께 의탁하는 기도를 올렸지요.

이처럼 온전한 사랑은 나의 모든 것을 다 내어 줄지라도 내가 갖고자 하는 마음이 없음은 물론이요, 사랑을 공급해 준 상대로부터 오히려 해를 받아도 그 영혼에 대한 사랑은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2) 자신을 정확한 눈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주님을 만난 이후로 한 번도 그 사랑이 변개하지 않았고 주님을 위해, 영혼들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 주었던 사도 바울도 항상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을 철저히 낮췄던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9:27에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했으며, 고린도전서 15:31에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했지요. 이 밖에도 사도 바울이 얼마나 자신의 의와 틀과 생각과 이론을 철저히 부서트리기 위해 자신을 낮추며 주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고자 노력했는지가 성경 곳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복음서를 제외한 대부분의 신약 성경을 기록할 만큼 아버지 하나님과 밝히 교통하였고 깊은 영의 세계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지요. 또한 많은 표적이 따랐으며 심지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는 희한한 능까지 따랐습니다(행 19:11-12).

이처럼 하나님의 보장을 받고 하나님과 밝히 교통하는 사도 바울인데도 주님의 뜻은 분명히 전하되 어떤 부분에서는 굳이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내 생각에는, 내 뜻에는 이것이 더욱 좋으니라”고 기록했던 것을 볼 수 있지요. 그만큼 주님 앞에 자신을 낮추며 자신이 다 이루었다 생각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나를 본받으라” 말했던 것도 결코 자신을 자랑하고자 함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지요. 자신이 내보인 주님에 대한 열정과 영혼들에 대한 사랑함을 본받는 것은 물론, 자신을 철저히 낮춤과 자기를 철저히 부인했던 모든 것을 본받으라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혹여 여러분 가운데 영안이 열려 영의 세계를 본다거나, 오랜 신앙생활을 통해 영적인 빛의 말씀을 들음으로 믿음이 성장했고 하나님 나라를 이룸에 있어서 자신이 꼭 필요한 존재라고 혹여 마음이 높아지지는 않았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성령의 감동을 입어 기록한 본문에도 2절에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했습니다. 왜 이같이 말씀하신 것일까요?

아무리 하나님의 뜻을 밝히 안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빛이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비추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하나님이 되어 다른 사람을 비추면서 판단하고 심지어는 정죄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높이는 무서운 죄를 범하는 것이니 차라리 하나님의 뜻을 몰랐을 때보다 못한 결과를 내고 마는 것입니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한 분, 아버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약 4:11).

이처럼 마음이 높아지면 자신의 모습은 정확히 보지 못하는 대신 자신이 옳다 생각하는 자기적인 판단의 잣대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그 내용을 입술로 내기도 합니다. 또 그렇게 낸 말이 판단 받은 사람에게 들어가 많은 상처를 입히는 일들도 발생하지요. 그러나 온 영으로 들어가 하나님의 뜻을 밝히 알게 된다면 내가 아버지의 뜻을 안다 하는 것으로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하는 일은 결코 생기지 않습니다. 온 영으로 들어갔다면 이미 그 안에 온전한 사랑이 임해졌기 때문이지요.

저 또한 아버지의 뜻을 밝히 알지만 “내 말이 곧 아버지의 뜻이니 내 말대로 하시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상대의 믿음과 중심에 따라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은 알려 주되 상대가 스스로 좋은 편을 택하도록 합니다. 비록 아버지의 일이 더뎌진다 할지라도 상대의 입장에서 한 번 더 생각해 봅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말씀하신 대로 일꾼들이 변화되어 믿음이 장성할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며 그동안에 다가오는 모든 어려움들을 사랑으로 견뎌냈던 것입니다.

이처럼 온전한 사랑이 임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정확히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철저히 자신을 낮추고 발견하여 온전히 진리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나는 의롭고 믿음이 있으며 아버지를 사랑하고 목자를 사랑하며 이처럼 충만하게 달려가고 있으니’ 하면서 자기 스스로 위로를 받는다면 자신을 정확히 바라볼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자신 안에 높아지고자 하는 마음이 있음도, 자신이 섬김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있음도 발견하지 못하므로 영으로 정체될 수 있는 것이지요. 주님을 사랑하기에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내어주는 헌신과 충성을 하며 달려왔지만 이처럼 영으로 정체되어 있다면 너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니 말씀을 통해 자기 자신을 정확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면 부분적으로 아는 것을 가지고 전부를 아는 것처럼 생각했던 어린 아이의 일을 벗게 되므로 비로소 영의 사랑이 맺혀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처럼 믿음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사랑에 있어서도 주님의 장성한 분량, 곧 온전한 사랑에 이르러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막달라 마리아는 온전한 사랑이 임해 있었기에 자기의 모든 것을 팔아 주를 섬긴다 해서 주님께 어떤 것을 얻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항상 겸손히 선 가운데 주님을 바라봤기에 주님께서 행하시는 일에 대해 가타부타 말을 한다든가 주님의 뜻보다 자신의 뜻을 앞세우는 일은 더더욱 없었지요.

항상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왜 그와 같이 행하시는지를 온전히 이해했으므로 변함없는 사랑으로 늘 주님 곁에서 힘이 되며 충만히 달려갔던 막달라 마리아처럼 온전한 사랑을 이룸으로 새예루살렘의 빛나는 자리에 이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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