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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차 영·혼·육(8)
설교자 당회장 이재록 목사 설교본문 고후10:3-6 날짜 2004.04.25
지난 시간에는 비진리에 속한 혼의 작용의 다섯 가지 대표적인 분야로 이해하지 못하고 품지 못하는 것, 판단, 정죄, 잘못 전달하는 것, 악한 감정을 품는 것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러한 비진리에 속한 혼의 작용이 아닌 진리에 속한 혼의 작용 즉 영의 생각만을 할 수 있는지 그 방법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증거하겠습니다.

1. 영혼육의 말씀은 성결의 길, 축복의 지름길임을 알아야

우리 사람은 눈에 보이는 몸, 곧 육과 보이지 않는 영과 혼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영혼육 말씀은 사람의 영과 혼과 육에 대해 밝히 알려주므로, 우리 자신의 영혼육이 어떻게 생겨났고 어떻게 만들어져 왔는지를 깨닫게 합니다.
자신의 영혼육에 대해 아는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온전한 주님의 형상을 입으려면 먼저 자신의 영혼육을 발견하여 부족한 점을 깨달아야 하며, 그 부족함을 채움으로 자신의 영혼육을 온전케 할 때 그것이 바로 성결의 길이며, 축복의 길이 되지요.
또한 축복의 길을 알려주는 영혼육의 말씀이 결국은 새예루살렘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곧게 뻗은 지름길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2. 하나님께 축복을 받으려면 비진리에 속한 혼의 작용을 하지 말아야

혼은 '사람의 두뇌에 있는 기억 장치'와 '그 안에 저장된 기억 내용들' 그리고 '이 내용들을 재생해서 활용하는 생각'을 다 포함하여 총칭하는 용어입니다. 사람들은 거의 항상 혼의 작용을 하면서 살아가는데 매일, 매순간, 무엇인가를 보고, 듣고, 느끼면서 그 내용을 기억해 둡니다. 전에 보고 들은 여러 가지 내용들을 떠올려 생각하거나 앞으로 할 일을 계획하기도 하고, 옳고 그름을 분별하거나 논리적으로 추론하기도 하는데, 이런 모든 것들이 '혼의 작용'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똑같은 상황에 처한다 해도 모두가 동일한 혼의 작용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살아오면서 어떤 경험을 했는지, 어떤 환경에서 어떤 가치관을 만들어왔는지 개인적인 취향과 성격은 어떠한지, 이런 것들에 따라 다 달라집니다.
문제는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이 혼의 작용을 할 때, 진리에서 벗어난 혼의 작용을 한다는 데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과 불편한 관계가 되면, 그 사람의 말 하나하나에 걸림이 되거나 자신의 생각에 맞추어서 다른 사람들의 의도를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상대는 진실을 말했는데도 거짓말을 한다고 단정하거나 자신의 감정에 맞춰서 오해를 하지요.
가령, 사이가 안 좋은 동료가 "사무실을 깨끗하게 청소합시다" 하면 그냥 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하나 꼬아서 생각합니다. '저 사람이 또 나를 빗대어서 말하는구나' 생각하거나 '자기가 직접 청소하면 될 텐데 자기는 하지 않고 남들한테 시키려고 한다'는 등, 이런저런 비진리의 생각을 하면서 상대를 점점 더 싫어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비진리의 혼의 작용을 하게 되면 육신의 생각, 곧 비진리의 생각들이 마음에 무거운 짐이 되어 생명과 평안이 사라지게 됩니다(롬 8:6). 그럴수록 마음은 점점 더 비진리로 물들어 악한 마음으로 변해가게 되니 하나님 앞에서도 담이 되어 축복받을 길이 막히게 되는 것이지요.

3. 진리에 속한 혼의 작용을 하려면

우리는 때로 살아가면서 비진리의 혼의 작용을 하면서도 즉시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나중에 하루를 돌아보며 기도하다 보면 성령께서 깨우쳐 주시고, 떠올려 주시기도 합니다. 이렇게 항상 깨어서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하고, 진리에 속한 혼의 작용을 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하지만, 때로는 아무리 진리로 생각하려고 해도 자꾸만 비진리의 생각이 떠오르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혼의 작용을 진리로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로, 모든 것을 진리의 기준이 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분별해야 합니다.
사람마다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양심이나 세상에서 옳다고 여기는 가치 판단의 기준은 대부분 시간과 장소, 문화 등에 따라 달라집니다. 단 하나의 변하지 않는 절대적인 기준은 진리 자체인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 중에는 성경 66권의 진리와 일치하는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도 많이 있지요.
예를 들어, 세상에서는 원수를 갚아야 의로운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비겁하다고 생각을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만약 친한 친구가 범죄했는데 다른 사람이 범인으로 몰려 누명을 썼을 때 친구의 잘못을 말하지 않는 것이 친구에 대한 의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누명 쓴 사람의 억울함을 알면서도 침묵을 지키고 있다면, 하나님 앞에서 결코 의롭다 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하나님을 믿기 전에는, 식사 시간이 다 되어 남의 집에 가면 아직 식사를 하지 않았다 해도 "저는 식사하고 왔습니다" 말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전혀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을 알고 진리에 비춰보았을 때 이 또한 엄연히 거짓말이었던 것입니다. 상대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마음은 좋지만 그 방법 자체는 진리가 아니었기에 이런 사실을 깨달은 후로는 그냥 "먹고 싶지 않습니다" 한다거나 다른 표현으로 바꾸어 말하게 되었습니다.
또 우리 주변을 보면 부모님들이 받기 싫은 전화가 왔을 때나 만나고 싶지 않은 손님이 왔을 때, 자녀들에게 "지금 없다고 해라"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번번이 진리에 어긋나게 행하면서도 '내가 거짓말을 하는구나' 깨닫지를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남의 물건을 빌려 쓰고는 돌려주지 않는다거나, 말하지 않고 남의 것을 사용했으면서도 사소한 일이라고 해서 도적질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요.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비춰볼 때는 사람들의 일상 속에 너무나 많은 것들이 진리에서 벗어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세대가 점점 더 악해질수록 자기 유익을 구하여 비진리를 행하면서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아지고 있지요. 그러면서도 남을 판단 정죄할 때는 자기 자신의 기준을 가지고 잘못되었다고 정죄합니다.
예를 들어, 정치하는 사람들이 경쟁자들을 비방하는 것을 보면, 자신이 옳고 남은 틀렸다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자신들은 나라와 국민을 위한다고 말하지만 상대방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비난하지요. 그러면 지켜보는 국민들까지도 편이 갈려서 "이들이 옳다, 저들은 그르다" 판단하고 서로 다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판단이 과연 진리에서 나오는 것일까요? 정말 나라를 사랑하고 국민을 위하는 선한 마음으로 행동하는 것인지, 아니면 자기 유익을 구하는 것인지, 사람은 모른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다 아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이 그 중심을 다 읽지는 못한다 해도 진리의 말씀에 비춰 보면, 각 사람의 말 한 마디나 행동 하나를 통해서도 그 마음에 얼마나 악이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편지에 악한 표현으로 누군가의 허물을 알리고 비방하는 내용이 기록되었다면 그 편지에 기록된 내용을 그대로 믿으시겠는지요? 편지에 사용된 악한 표현들만 봐도 편지를 쓴 사람이 얼마나 비진리의 마음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악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다른 사람을 비방한 내용을 사실이라고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양식삼아서 진리로 모든 것을 분별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진리를 열심히 듣고 배움으로 우리 안에 양식삼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66권을 열심히 읽어야 하고, 세상에서 비진리로 잘못 입력된 기준들을 벗어 버려야 하는 것이지요. 세상에서 아무리 지혜로운 것이라 해도 하나님의 말씀과 어긋나는 것은 모두 벗어버려야 합니다. 이처럼 세상에서 입력된 비진리를 벗어 버릴 때라야 비로소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지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고전 3:18).

둘째로, 느낄 때도 진리에 합당하게 느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미움'이라는 감정을 버리려고 해도 상대를 볼 때 싫은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하기도 하지만, 느낌이라는 것도 결국 혼의 작용, 곧 생각에 따라 달라집니다.
오래 전에 영화에서 이런 장면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한 소녀가 어릴 때부터 코끼리와 매우 친해서, 코끼리는 소녀의 목에 긴 코를 감고 장난을 하기도 했지요. 하루는 이 소녀가 자는데 독사가 와서 그 목을 감았습니다. 만약 그것이 독사인줄 알았으면 소녀는 얼마나 두렵고 징그럽게 느꼈을까요? 소녀는 여전히 눈을 감은 상태에서, 자기 목을 감는 것이 코끼리의 코라고 생각하니 놀라지도 않고 오히려 다정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일상생활 속에서도 보면 이런 일들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좁은 폭의 나무다리를 건너갈 때도 그 다리가 지면에서 1미터쯤 되는 높이에 있을 때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밟고 지나갑니다. 하지만 똑같은 다리를 만약 10미터쯤 되는 높이에 두면, 그때는 겁이 나서 지나가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지요. 또 구더기나 지렁이, 지네 같은 것들을 보면 징그럽고 더럽다고 질색을 하는 사람들도, 그런 것을 잡아먹고 사는 닭은 맛있게 먹습니다.
이처럼 느낌이라는 것도 다 자신이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을 볼 때도, 어떤 일을 대할 때도 좋게 생각하고 좋은 느낌으로 받으면 됩니다. 내 성격과 교양에 맞지 않는 사람도 "저 사람은 참 싫다", 이렇게 생각해 버리면 안 좋은 느낌과 감정으로 남게 되지만,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이해하면서 좋게 생각하면 느낌도 좋은 느낌으로 입력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범사에 선으로 생각하여 선으로 느끼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항상 선한 것을 보고 입력시켜 나가야 합니다. 물론 세상을 살아가면서 매스컴이나 인터넷을 통해 잔인하고 폭력적인 것, 거짓된 것, 자기 유익을 구하고 간사하고 배신하는 것 등 악한 것을 더욱 많이 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리로 자신을 지키려면 이런 것들을 보지 않고 듣지 않고 기억에 담아두지 않는 것이 더 좋습니다.
그러나 부득이하게 접하게 된다 해도 그 접하는 것들을 매순간 진리로, 선으로 입력하면 된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영화에서 폭력적인 장면을 보았을 때, 세상 사람들은 "나도 저렇게 많은 사람을 휘어잡고 싶다", "참 멋있다" 생각할 수 있지만, 진리로 분별하는 사람은 "저렇게 폭력적인 것은 남을 고통스럽게 하는구나, 나는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 이렇게 생각하고 느끼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과연 나는 어떠한 혼의 작용들을 하는가"를 밝히 깨닫고 발견함으로 비진리에 속한 혼의 작용들을 다 벗어 버리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진리의 생각들만 하는 신령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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