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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차 영·혼·육(6)
설교자 당회장 이재록 목사 설교본문 고후10:3-6 날짜 2004.03.07
지난 시간에는 혼과 혼의 작용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오늘은 진리에 속한 영의 생각을 이루기 위해서 비진리에 속한 혼의 작용에 대해 구체적으로 증거하면서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육의 생각에는 어떠한 것이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비진리에 속한 혼의 작용

혼이란 사람의 두뇌에 있는 기억장치와, 그 안에 저장된 기억 내용들, 그리고 이러한 지식들을 재생해서 활용하는 생각이 모두 포함된 것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선한 것을 머리 속에 저장해두면 진리의 생각을 할 수 있지만 악한 것을 저장해두면 비진리의 생각을 하게 되지요. 이러한 혼의 작용은 우리가 신앙생활하는 과정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합니
다. 세상 사람들도 종종 세상 만사가 다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말을 하는 것처럼 같은 일이라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좋은 결과를 낳기가 쉽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좋지 못한 결과를 낳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으로도 비진리에 속한 혼의 작용으로 육의 생각을 하느냐 아니면 진리에 속한 혼의 작용으로 영의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며, 인생을 마친 후의 결과도 크게 달라집니다. 곧 영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께 큰 축복을 받을 것인가 그렇지 못할 것인가, 심지어는 천국에 갈 것인가, 지옥에 갈 것인가가 결정되는 것이지요.
또한 사람이 비진리에 속한 혼의 작용으로 육의 생각을 하면, 자신에게도 해가 될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도 큰 해를 입히게 됩니다. 예를 들어 전혀 무죄한 사람을 판단 정죄하여 소문을 퍼뜨리면 하나님 앞에 죄의 담을 만들 뿐 아니라 소문의 당사자를 심히 어렵게 만듭니다. 혹은 선한 의도에서 행한 일을 오해함으로 서로 감정을 품는 경우도 있으며 반대로 잘못된 혼의 작용으로 상대를 힘들게 하는 경우도 있지요.

2. 혼의 작용에 의한 육의 생각들

1)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품지 못하는 것
사람이 살아가다 보면 나름대로의 취향이나 가치관, 혹은 옳다 하는 것에 대한 틀이 생기게 됩니다. 옷을 입는 것만 보아도 화려하고 특이한 디자인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단순하고 깔끔한 디자인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지요. 같은 영화를 보아도 재미있다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지루하다고 합니다. 똑같은 사람을 보고도 한 사람은 시원하고 화통하게 보여서 좋다고 하는데 다른 사람은 경솔하고 성급하게 보인다고 생각하지요. 이렇게 기질이 비슷한 사람끼리는 좋아하고 쉽게 친해지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에 대해서는 불편한 느낌을 갖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김 집사님은 적극적이고 개방적인 성격이라서 무슨 일을 하려면 화끈하게 해야 하고, 혹여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솔직하게 말해야 속이 시원합니다. 그런데 이 집사님은 좋든 싫든 감정을 잘 표현하지도 않고 일을 해도 꼼꼼하게 살펴서 결정하기 때문에 김 집사님이 보기에는 이 집사님이 너무 답답하고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한편 이 집사님도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김 집사님을 대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는 사람으로 여기게 됩니다. 이는 내가 보기에 좋은 것만을 좋게 여기고 내가 옳다고 여기는 것만을 옳게 여기므로 상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2) 판단하는 것
판단은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 자기의 틀이나 느낌 등으로 단정 짓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해외여행을 하다 보면 식탁에서 코를 풀면 무례하고 교양 없는 행동으로 여기는 나라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나라도 있습니다. 또한 초대받았을 때 음식을 남기면 무례하다고 여기는 나라가 있는가 하면 그릇을 깨끗이 비우면 교양이 없는 행동이기에 반드시 약간은 남겨 놓아야 한다는 나라도 있는 것을 봅니다.
그 외에도 인도 사람이 손으로 음식을 집어먹는 것을 본 외국 사람이 비위생적이라고 말하자 인도 사람은 "내 손은 내가 깨끗하게 씻어서 먹지만 식당의 포크나 나이프는 얼마나 깨끗한지 모르니 손이 더 위생적이다"라고 주장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똑같은 상황에 대해서도 자신이 어떻게 배웠는가에 따라 전혀 느낌이 다르고 생각이 달라지는 것이지요.
지역과 문화뿐만 아니라 시대에 따라서도 크게 차이가 납니다. 예를 들어 예전에는 학교에서 가요를 부르면 아주 불량한 학생으로 여겨졌으나 오늘날은 그렇지 않은 것을 봅니다. 한때 유행했던 옷 스타일이 유행이 바뀌면 촌스럽게 여겨지기도 하며 세월이 지나면 다시 이전의 유행으로 돌아가기도 합니다.
또한 자신의 생각과 느낌에 맞춰 상대의 의도나 행동을 판단해 버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은 상대도 거짓말을 한다고 판단하기가 쉬우며 남의 허물을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상대가 작은 소리로 말하는 것을 보고 저 사람들이 내 허물을 말하고 있나보다 하면서 판단하기가 쉽습니다.
한 예를 들면, 어느 형제가 한 자매만 보면 얼굴이 붉어지는데 이것은 예전에 자매에게 실수한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켜본 사람이 저 형제가 저 자매를 좋아하나 보다 판단하는 것이지요. 혹은 시력이 나쁜 사람이 자신을 보지 못해 인사를 못하고 지나갔는데 저 사람이 나에게 무슨 감정이 있나, 왜 나를 무시하고 지나가지 하고 판단하기도 합니다.
원래 표정이 딱딱한 사람을 보고 저 사람은 왜 나만 보면 얼굴이 굳어있을까? 나를 싫어하나 보다 판단하기도 하지요. 만약 잘 아는 남녀가 우연히 호텔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면 세상에서는 저 사람들이 호텔에 들어갔다 나오는구나 판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어쩐지, 예전부터 서로를 바라볼 때 눈빛이 다르더라 하면서 해석까지 붙이기도 하지요.
저도 성도님들과 악수를 하다 보면 일일이 눈을 마주치고 웃어 주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분들은 왜 나를 안 쳐다보시나,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안 웃어 주시나 하면서 생각을 동원하는가 하면 더 나아가 당회장님이 나를 외면하시는구나 하고 서운해하기까지 하는 경우도 있지요. 물론 이것이 성령의 역사 가운데 오는 깨우침이라면 중심으로 감사하고 돌이켜서 충만한 모습을 이루면 되지만 육의 생각으로 인해 스스로 상처를 받으면 침체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동문서답도 판단으로 인해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 예로 지각을 자주 하는 사람에게 "오늘 아침에는 사무실에 몇 시에 왔느냐?"고 물으면 대답하는 사람은 기분 나빠하면서 "나 오늘은 지각 안했어!" 하는 것입니다. 단지 몇 시에 왔는지를 물었는데 저 사람이 내가 또 지각한 줄 알고 있구나 이렇게 판단하고 엉뚱한 대답을 한 것이지요.
이렇게 사람들은 일상생활이나 교회 안에서도 많은 판단을 하며 살아가면서도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때로는 "안 봐도 뻔하다", "척하면 안다"는 말까지 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지식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친히 보고 들은 것이라 해도 속사정까지는 알 수 없는 경우가 많지요. 그러니 보지 않고 듣지 않은 일을 나름대로 추측하며 사람의 마음을 판단한다면 이는 너무나 잘못된 일이요, 오직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만이 모든 것을 아시고 판단하실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3) 정죄하는 것
자신의 생각에 맞춰서 상대를 판단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정죄까지 내리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자매를 보고 얼굴이 붉어지는 형제에 대해 저 형제가 저 자매를 좋아하는구나 하고 판단하는 정도를 넘어 저 형제가 마음에 간음이 많구나 하고 정죄를 해 버립니다. 눈이 나빠서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가는 사람에 대해 눈이 마주치고도 왜 인사하지 않을까 하고 판단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저 사람은 너무 교만해서 안하무인이야! 하고 정죄를 내리는 사람도 있지요. 이처럼 상대를 판단 정죄할 때 이미 그는 하나님처럼 교만해진 것이고 이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가 정죄받게 되는 것입니다(약 4:11-12).
더구나 세상 사람들은 영적인 일들을 들으면 자신의 지식과 틀 속에서 이해하지 못하므로 판단 정죄가 나옵니다. 예를 들어 병원에서도 고침받지 못하던 병을 기도받고 치료받았다고 간증하면 설마 기도만 받고 어떻게 병이 치료되나? 약도 먹으면서 기도를 받았겠지 하거나 기분상 나아졌다고 착각하는 것이겠지 하고 판단하게 됩니다. 때로는 간증하는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정죄하는 경우도 있지요. 또한 하나님의 능력으로 홍해가 갈라지고, 해와 달의 운행이 멈추었다거나 쓴물이 단물로 변하는 성경상의 기적들에 대해서도 거짓으로 지어냈다고 정죄합니다. 이는 한 치 앞도 모르는 인생이 하나님의 역사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 것이지요.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성령의 역사를 판단하고 정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환상을 보았다"거나 "계시를 받았다" 하면 "잘못되었다", "신비주의다" 하는 사람도 있지요. 이런 일들은 분명히 성경에도 기록된 하나님의 역사인데 나름대로 만들어 온 신앙의 틀 속에서 성령의 역사를 정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 중에서도 자신들이 생각하는 기준에만 맞춰 예수님을 판단하고 정죄했던 일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치셨다면, 하나님의 능력이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것에 더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데 어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서 일을 했으니 예수님은 안식일을 범하는 죄인이라고 정죄하는 것이지요.
만약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일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안식일에 예수님을 통해 치료의 역사를 베풀어 주실 리가 없으며 또 예수님이 죄인이라면 하나님께서 죄인을 통해 병자를 치료하는 능력을 베풀어 주실 리가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기준에 맞춰 하나님까지도 감히 판단 정죄합니다. 예를 들어 선악과를 두신 섭리에 대해 모르면서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고 범죄하여 고통받게 하셨으니 하나님은 나쁜 하나님이라 합니다. 혹은 자신의 잘못으로 시험환난을 당하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이런 시련을 주셨다고 하거나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하지 않으시니 하나님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짓는 것이요, 자칫하면 성령 훼방, 모독, 거역의 죄를 범하여 회개할 기회조차 얻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신이 가진 지식과 생각의 한계 속에서 사물과 사람을 바라보면 자신도 하나님 앞에 범죄하여 축복과 응답이 막힐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고통을 주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의 지혜를 미련한 것으로 여기고 하나님께서 합당하게 여기시는 진리의 기준에 맞춰 범사를 분별해 나갈 때 정녕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으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응답과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영적인 지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고전 3:18).
따라서 자신의 혼의 작용을 잘 점검해 보고 매 순간 진리에 속한 혼의 작용으로 오직 영의 생각을 함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윗글 : 2차 영·혼·육(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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